예술가로서의 삶이 위대하다는 것은 그가 어떤 식으로든 이 비판함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단계 넘어 창조에 대한 실현에 자신의 모든 삶과 정열을 매진했기에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예술가라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러한 정신을 가진 이는 매우 드물지요. 그래서 저는 이 예외적인 이들을 예술가라기보다 '창조자'라 부르고 싶습니다.
주의할 것은 창조자를 니체가 말한 ‘초인’과 동일시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체의 초인은 우리에게 비판의 시도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정작 문제가 되는 창조는 각자의 몫으로 돌려버립니다. 책임의 전가. 그는 인도자였습니다. 창조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이미 출발 전부터 알고 있었던 셈이지요.
젊은 날의 니체의 장황함과 격정이 담긴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은 그가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언급했듯이 분석적이고 회고적인 능력을 갖춘 예술가, 즉 사람들이 찾아다녀야 하지만 전혀 찾으려하지 않는 예외적인 종류의 예술가에 관해 다룹니다.
이 예외적인 예술가란 ‘긍정의 창조자’입니다. 그는 어찌됐건 최후에 긍정할 줄 아는 자입니다. 이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낙관적인 것도 아니요, 긍정의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고, 헛된 희망이라든가 구원과 같은 부정의 세계를 순응하게 하는 어떤 가식적이고 논리적인 범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긍정의 창조자는 자신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이를 통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을 기만하는 어떤 것에도 긍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끌고 내려갑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떨어질 곳조차 없는 그 나락의 끝에서 그는 드디어 박차고 올라섭니다.
긍정, 창조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 비롯됩니다. 그가 결코 절망치 않는 것은 최후를 긍정하고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승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반항자의 최후의 긍정이요, 긍정의 창조인 것입니다.
우리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통해 긍정의 창조자가 어떻게 잉태되는가를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디오니소스적 기반 위에 아폴로라는 이름으로의 포괄! 이 두 예술 충동의 영원한 형평 원칙에 의거한 상호 조화 속에서 하나의 고귀하고 거대한 힘이 싹트게 됩니다.
삶의 일상적 구속과 한계를 파괴시켜 버리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사물의 본질을 올바로 들여다보고 인식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행동하는 것은 구역질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의 행동은 사물의 영원한 본질을 조금도 바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스꽝스럽고 불명예스러운 것입니다. 그는 결국 죽음을 향해 치달립니다.
이러한 최악의 상태에서 그에게 한 사람이 다가옵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의 아폴로적 인간! 그녀는 구원과 치료의 마술사로 접근해 옵니다. 아폴로적 인간은 우리에게 삶이라는 것을 매순간 살아 볼 가치가 있게 만들고, 그 다음 순간을 체험해 보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순간들의 수많은 환영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세계의 가장 위대한 사건! '긍정의 창조자'의 탄생을 위한 결혼, 축혼이 이루어집니다. 인류 최대의 고요하지만 거대한 축제, 어긋났던 대지와 인간과의 만남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