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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개발자들이 처한 ‘부조리한 현실’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을 통해 공론화 되어 왔습니다. 잦은 야근과 밤샘, 열악한 처우, 영세성에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SW 업계, 이공계 기피 현상, 잘못된 개발환경과 관행, 개발자들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 등 그동안 여러 문제들이 제기되어 왔고, 나름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도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문제들은 현재진행형이며, 몇몇 개발자 커뮤니티나 블로그를 살펴보면 앞으로가 마냥 핑크빛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기보다 국내 개발자들이 처한 현실 자체가 엉킨 실타래처럼 풀기 어렵고, 오히려 풀려고 할수록 더 엉키는 형국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국 개발자가 처한 현실에 대한 문제는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많이 언급됐기에 새삼스레 다시 반복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개발자들이 겪는 현실적인 문제보다 그로 인해 개발자가 느끼게 되는 ‘부조리한 감수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개발자라는 한 개인이 품은 생각에 초점을 맞출 생각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동일하게 느낀다. 그것이 바로 보편이라 불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기에 앞서 개인의 문제를 조명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속에서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먼저 여기서 말하는 ‘부조리’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전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다’라는 의미입니다. 많은 이들이 말하는 국내 개발자들이 처한 현실은 이런 사전적 의미에서의 부조리한 현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조리한 감수성은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좀 어려운 표현이지만)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아무튼 개발자가 느끼는 부조리한 감수성은 매우 다양합니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몇몇 현실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부조리한 감수성은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문제가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어려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이라든가, 이성이나 가족 문제,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 정체성의 부재 등 한 개인으로서 겪는 개발자의 고민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흔히 말하는 사회적인 문제보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사소한 것이 개발자로 살아가는데 더 큰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문제는 공론화되고 누구나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개인적 차원의 문제는 아무도 알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도 밝힐 수 없는 남모를 고민과 고통은 누구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인 문제는 오직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중에서

이 말은 개발자에게도 선행돼야 할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외의 것들, 예들 들어 개발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Java를 배울지 C를 배울지, 개발자의 존재는 무엇인가 등의 물음은 나중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삶의 가치로서 개발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즉, 개발자로서 과연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K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패키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벤처 회사의 개발자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면서 회사에 출근한다. 하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다. 출근하는 동안에도 다음 주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프로젝트 생각으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어젯밤도 어제 해결 못한 문제를 고민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샜다.
한편으로는 애인과 헤어질 것 같아 걱정이다. 잦은 밤샘과 늦은 퇴근, 휴일도 반납하면서까지 일 한지 벌써 몇 개월. 데이트할 시간조차 없다. 애인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다. 물론 처음에는 애인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지만, 지금은 점점 지쳐 같은 것 같았다. 벌써 전화로 심하게 다투기를 여러 번.
출근 후 며칠째 반복하고 있는 디버깅 작업을 한다.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것 같다. 사장은 언제나 "이 프로젝트만 무사히 마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고 고생하자" 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하지만 그는 회사가 잘되고 있는지 아닌지 잘 모른다. 단지 월급이나마 꼬박 나왔으면 하는 것이 작은 바람이다. 그래야만 어려운 집안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다시 그는 반복되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앞의 글은 개발자의 여러 일상을 ‘K’이라는 인물을 통해 짧게 구성해 본 것입니다. 개발자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일상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상을 지탱해준 것은 '습관'입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코딩과 디버깅 작업, 이러 저러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등 그것은 마치 아침에 일어나면 양치와 세수를 하는 습관처럼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똑같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왜 내가 개발자로 살아가야 되지?’라는 의문에 봉착합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다가옵니다. 처음에는 프로그래밍이 재미있고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내게 닥친 현실이 어려워도 나름대로 견딜 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드는 순간 그는 현실과 단절된 상태에 빠집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으며, 심지어 자신의 존재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이 드는 순간이 바로 ‘부조리한 감수성’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계속)

* 참고로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한 ‘부조리한 감수성’에 대한 내용은 프랑스 작가이자 사상가인 알베르 카뮈의 유명한 저서 ‘시지프 신화’를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 또한 그 책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이글은 블로터닷넷(www.bloter.net) 기사로 채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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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ele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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