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트렌드 및 전망 관련 몇몇 리포트를 보면 빠짐없이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SW 스택(Stack) 전략입니다. 비즈니스 영역에서 IT 컨버전스가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SW 분야에서도 점차 시스템의 복잡성을 줄이고, SW의 설치 위험과 비용을 낮추기 위해 SW 스택 전략이 거의 대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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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스택 전략이란 운영체제에서부터 데이터베이스, 미들웨어, 비즈니스 애플리케이션에 이르기까지 SW 전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제품군을 갖추고 이들 제품간 융합을 통해 보다 안정적이고 고도화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근래 몇 년 동안 IBM, MS, 오라클 등 대형 글로벌 SW 벤더들이 여러 SW 기업들을 인수 합병하면서 SW 스택 전략을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기 위한 것일 겁니다.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SW 스택의 장점은 이렇습니다. 고객 비즈니스와 최적으로 결합되는 다양한 기술요소가 화학적으로 융합된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기에 성능, 관리, 통합을 위한 불필요한 투자와 노력 축소되고, 이로 인해 단기적으로 시스템 통합 비용 절감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운영관리의 효율성 높여 궁극적으로 TCO 절감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 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Best of Breed 시대

IT Convergence 시대

IT기술 제공 방식

SI기업 주도의 시스템통합 서비스 제공

SW 스택을 통한 토탈 엔터프라이즈 솔루션 제공

기술과 비즈니스의 우선성

선택된 기술요소에 맞춰 시스템 최적성 좌우

비즈니스 목표에 맞춰 최적으로 융합된 기술요소 적용

기술 통합의 성격

기술요소의 물리적 연계통합

기술요소의 화학적 융합

고객의

신기술 적용 시점

해외에서 선적용 후 (외국계) SW벤더 통해 국내로 확산시  적용 가능

자사 비즈니스와 최적으로 결합되는 솔루션을 다양한 원천기술 기반으로 먼저구현

글로벌 비즈니스 경쟁력에 미치는 결과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경쟁업체보다 늦게 신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시장 후발자 입장에 서게 되어 시장장악 힘듦

최신 표준기술을 채택한 최적의 솔루션을 경쟁업체보다  먼저 적용해 time-to-market 실현 가능

TCO 절감 관련

별도의 높은 통합비용과 위험 감수 불구, 유지비용 지속적으로 증가

단기적으로 SW제품간 통합비용 부담 해소, 장기적으로 운영, 유지보수 비용 절감

 

아무튼 앞서 언급했듯이 SW 스택이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인 것만은 분명한데, 사실 우리네 입장에서 이런 상황이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몇몇 대형 기업들이 막대한 자금력으로 특정 분야에서 잘 나가는 SW 기업들을 싹슬이 하다 보니 SW 기업 경쟁력의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국내 SW 산업의 현실을 살펴볼까요? 국내 SW 시장 규모는 전 세계 시장 대비 1%에 불구합니다. 이웃 일본과 비교해도 1/10 수준이지요. 그나마 그것도 외국계 기업의 점유율이 80% 이상입니다. 패키지 SW 경우에도 세계 100대 기업 중 국내 기업은 전무한 상황이고 연 매출이 10억 이하인 업체가 국내 SW 기업의 70%가 넘는 등 아직 국내 SW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취약한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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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SW 스택 전략처럼 몇몇 대형 글로벌 기업의 영향력만이 더욱 확대되는 이와 같은 흐름은 국내 SW 산업의 발전이나 국내 SW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국내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인 티맥스소프트가 운영체제 기술 및 CRM, ERP 등 애플리케이션 제품들을 발표하면서 개방형 SW 스택전략을 펼친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는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고 판단됩니다. 글로벌 대형 SW 벤더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SW 스택을 갖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마케팅이나 영업 등 기타 다른 역량들은 차치하더라고 최소한의 SW 스택을 위한 기술력과 제품군을 갖춰야 글로벌 경쟁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안 그런다면 향후 도태되어 망하거나, 인수합병 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SW 시장은 초기 선점이 어렵지만 규모의 경제 및 네트워크 효과가 매우 강해 시장 점유가 확대될 수록이 이익이 급증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국내 SW 산업의 국가 경쟁력과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기 위한 생태계 조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다들 강조하고 있지요. 정말 SW 산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단순히 위기의식만을 느껴서만 될 문제가 아니겠지요.

 

정말 향후에 IBM, 오라클, MS 3개사가 국내는 물론 전세계 SW 시장 100% 석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정말 단지 우려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SAP MS IBM이 인수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말들이 나오니 말입니다.

 

몇몇 SW 분야에서 국내 시장점유율 1위하는 국내 SW 기업들이 있습니다. 물론 아쉽게도 규모가 큰 운영체제나 데이터베이스 등의 분야는 여전히 외국 업체이지만 말입니다. 꿈 같은 이야기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전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하는 분야가 국내 SW 기업에서 나오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위기감이나 패배주의 같은 절망감보단 어떤 상황에서든 희망을 가지는 것이 더 낫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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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모 IT 업체의 개발자 컨퍼런스에 참석차 미국 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가 특히 설렜던 것은 이바 야콥슨, 짐 럼버와 더불어 소프트웨어 공학계의 3대 거목이자 UML 개발을 주도했던 그래디 부치를 만나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죠. 개발자도 아닌 제가 경외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는데, 실제 개발자라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당시 같이 갔던 한 개발자의 굉장히 들떠 있었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그레디 부치 외에도 국내 개발자들이 존경하는, 일명 스타 개발자들은 대부분은 외국 사람들입니다. 객체지향의 아버지라 불리는 앨런 케이, 자바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든 제임스 고슬링, GNU 프로젝트와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을 이끄는 리차드 스톨만, 리눅스라는 운영체제를 만든 리누스 토발즈 등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이지요.

반면 국내의 경우는 어떨까요? V3라는 백신을 만든 안철수, 국내 최초의 TP-모니터 티맥스를 만든 박대연, 워드프로세스 아래아한글을 만든 이찬진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외에 마땅히 스타 개발자라고 언급할 만한 사람을 찾기가 참 힘듭니다. 국내 SW 산업의 열악한 환경만큼이나 스타 개발자들의 존재 또한 희박하지요. 게다가 근래 10년 동안 새로운 스타 개발자가 나오지도 않는 실정입니다.

스타 개발자가 필요한 이유는 그들이 많은 후배 개발자들에게 개발자로서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롤 모델(Role Model)'인 셈이지요. 그들의 일생을 보면서“나 또한 열정을 갖고 열심히 한다면 그들처럼 될 수 있다”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다른 어떤 조건보다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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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획기적이고 경쟁력 있는 SW 기술과 개념을 창조해 내는 힘은 사람이고, 그 사람이 오랜 세월동안 축척해 온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SW 산업에서 이런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는 분야별로 많은 스타 개발자가 나오고, 그들의 노하우가 후배 개발자들에게 잘 전달되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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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 개발자 양성을 위해 그동안 여러 제도적 장치나 각종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개발자 개인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스타 개발자의 존재감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이들이 개발자의 중요한 덕목으로 '끈기’와 ‘창의력’을 말합니다. 끈기란 체력과 집중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으로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을 경우 인내심을 갖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의미이며, 창의력이란 번뜩이는 아이디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끈기와 창의력은 단순히 학교나 학원의 교육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제대로 된 개발자 한 명을 양성하는 것이 획기적인 기술 하나를 만드는 것만큼 어렵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유일까요? 오히려 전자가 더 어렵고 드물 수 있지 않을까요? 국내에서도 앞서 언급한 앨런 케이, 제임스 고슬링, 리차드 스톨만, 리눅스 토발즈 등과 같은 수십 년의 노하우를 지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스타 개발자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그들이 더 많은 미래의 스타 개발자를 위한 초석이 되길 바라고요. 그리고 이를 뒷받침 하는 개발자 문화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한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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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오로지 의지의 명령만을 따르고, 한순간의 방심이나 결함도 허용하지 않고 감정과 세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이 작업이 착착 진행되어가는 이 모든 날들을 겪고 나서, 아! 그냥 자신을 맡긴채 손을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 어쩔 수 없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그 모든 시간 동안 나를 떠나지 않았던 저 비탄의 심장부로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건설되지 않는, 오직 무(無)이고 싶은, 내가 다듬어야 하는 이 작품, 너무나도 어려운 이 얼굴을 버리고 싶은 바람과 유혹 걷잡을 길 없었으니, 나는 사랑하고 있었고 아쉬워하고 있었고 욕망하고 있었고, 마침내 사람이었으니....... 여름의 황량한 하늘,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바다, 그리고 내민 저 입술." - 작가수첩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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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페스트'의 주인공 리외는 오랑시에 번진 염병(페스트)에 맞서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것을 신에게 기대기보다는 차라리 죽을 힘을 다해 싸워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이런 리외의 태도는 도스트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인 키릴로프는 "당신은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믿습니까?" 라는 스타브로긴의 질문에 "아니요,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믿습니다."라고 답한다(시지프 신화 참조). 

이 두 가지 예를 보면 니체에게 있어 신의 죽음이 카뮈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신이 되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이는 인간이 신의 경지로 승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부정이고, 나아가 신의 섭리에서 인간의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는 하나의 반역(?)의 성격을 지닌다.

카뮈에게 있어 실존은 순간마다 변하고 지속성이 없다. 또한 세계의 불합리와 인간의 합리의 의지 사이에 고통스러운  문제를 안고 있는 부조리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정이다. 하지만 카뮈는 하나만은 긍정한다(부조리에서 자살하거나 신을 향한 헛된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 카뮈에게 있어 긍정은 시지프가 그러하듯이 인간 개인의 불굴의 의지이다. 즉, 세계내에서는 무의미하지만 개인에게 있어서는 전부인 그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긍정은 곧 타인에 대한 긍정을 부르기 때문이다. 리외가 페스트를 퇴치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류애적인 사랑이다. 다시말해 자신의  존재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타인의 존재 또한 자신과 같다는 하나의 동질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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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지에 이르면 더이상 신의 개입을 불필요한 것이 된다. 이제는 신의 존재 유무에 관하여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카뮈는 삶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한 이것이 인간에 주어진 원초적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의 삶, 나의 반항, 나의 자유를 최대한 느끼는 것, 이것이 최대한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의 나는 곧 모든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 신을 고안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까지의 우주 역사의 요약이다."

신은 단지 인간이 극복해야 할 무엇이다. 그리고 이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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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미드(미국드라마) 중에 ‘X-파일’이란 것이 있습니다(개인적으로 전 시즌을 다 본 유일한 미드이기도 합니다). 이 미드는 FBI 요원인 주인공 멀더가 어린 시절 자신의 여동생이 외계인에 납치된 것이 정부의 음모에서 비롯됐다고 믿고, 동료인 스컬리와 함께 그 음모를 파헤치면서 감추어진 진실을 찾아나가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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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X-파일에 나오는 외계인의 존재나 지구 식민화 정책 등과 같은 거대한 음모이론은 영화 '컨스피러시(원제 자체가 '음모이론'이다)'에 와서는 우리 실생활에 더 밀접하게 다가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제리(멜 깁슨)는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이 음모에서 비롯됐다고 믿고 있으며, 실제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런 음모이론에 관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음모이론은 단순히 미드나 영화 속에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에서도 상당히 신빙성 있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실제로 이전에 한 설문조사를 보니 미국인의 절반 가까이가 (어떤 종류이든) 음모이론을 믿는다고 답변했더군요. 로스웰사건, 케네디 암살 그리고 최근의 9.11 테러까지 그 배후에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고 정부는 무언가 밝힐 수 없는 진실을 감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각종 정치적인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 실체적인 진실을 찾아야 한다고 하지만 결국엔 각종 음모만 난무한 체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언론에서는 진실에는 관심 없고 이런 음모론을 확대 재생산에만 여념이 없다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아무튼 음모이론이 생기는 이유는 정보의 공유가 자유롭지 못하고 특정인 혹은 집단이 그것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보소통의 불균형, 다시 말해 정보를 가진 쪽과 이 정보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망 사이에서 음모이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음모이론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음모론이 음모론을 낳고, 이렇게 음모론만 판치게 되면 정작 알고 싶고, 알아야 하는 진실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마치 음모이론이 진실인 것처럼 믿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음모이론은 대부분 그 내용이 흥미진진해서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고 싶게 만듭니다). 또한 음모이론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이 상당히 모호할 뿐만 아니라 설사 그렇다 해도 '아님 말고'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면 그만입니다.  

뜬금없이 음모이론을 언급한 이유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는 있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정보의 공유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특정 집단이 아닌 공공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쓰여야 된다는 점이죠.

웹2.0에 대해 말하면서 항상 뒤 따라오는 키워드가 ‘참여, 공유, 개방’입니다. 오픈API, 매쉬업, 블로그, 소셜네트워크 등 웹2.0을 위한 다양한 기술이나 서비스들도 결국 정보의 자유롭고 발전적 유통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일 것입니다.
거창하고 머리 아픈 철학적 담론일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웹2.0 시대란 ‘끊임없는 진실의 추구’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용자의 권리를 되찾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유란 GNU 프로젝트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속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를 말하며, 이러한 '자유의 보장이 결국 인류의 공존과 공영에 보다 근접한 실용적인 이상주의라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끔은 웹2.0 혹은 다가 올 또 다른 IT 패러다임이 담고 있는 시대정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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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오래 전 부터 좋아했고, 다른 많은 이들도 인정하는 명화(名畫) 2편을 소개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윌리암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입니다. 오랜 만에 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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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작품에는 물결이 소용돌이 친다. 별과 달이 춤을 추고 대지는 용솟음 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것들은 때로는 질풍노도와 같이 격동하고, 또 때로는 포근한 미풍과도 같이 일렁인다.

그는 인간의 내면성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 보인 화가이다. 집어삼킬듯한 폭퐁우와 그 이후에 올 평화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모순으로 가득찬 인간과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지만 그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빛을 동경하고, 빛의 순수성을 지키면서도 즉흥적이거나 정감적인 경향에 빠지지 않고 견고한 회화성을 되찾으려는 노력. 그의 작품에는 한단계 넘어선 색채의 혁명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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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너머로 자신의 일생을 성실히 마감한 태양이 마지막으로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하듯 서서히 넘어간다. 그렇게 바다 끝에 비친 석양은 온 화면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호젓한 풍경이고 비극적일지라도 오히려 더 할 것없이 생생하고 풍요롭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치 영원회귀를 꿈꾸듯이 말이다. 바다는 잔잔하며 하늘은 고요하다. 테메레르호는 머나먼 여정을 시작하지만 아무런 동요도 그 어떤 말도 없다. 그것은 침묵의 항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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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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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는 삶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항상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는 ‘결산과 정리의 취향’이 강한 작가였다. 다시 말해 그는 유행을 따르거나, 어떤 의도적인 목적으로 작품을 쓴 작가가 아닌 평생 일관된 주제를 갖고 끊임없이 노력한 향일성의 작가였던 것이다.

그는 “왜 사는가?”에서“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물음에 답해가는 과정에서 그의 성찰, 감수성, 행동 방식을 하나의 etage와 cycle로 나누었는데 그의 전 저작을 이와 같이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 제1단계 : 부정, 부조리, 자살 
  - 이방인(1942), 행복한 죽음 오해, 칼리큘라(1945) 시지프의 신화(1943)
* 제2단계 : 긍정, 반항, 살인
  - 페스트(1947) 정의의 사람들, 계엄령(1950/1948) 반항적 인간(1951)
* 과도기 혹은 3단계 이전 
  - 전락, 적지와 왕국(1954/1957)

그리고 ‘작가수첩3’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제3단계 이전 : '우리시대의 영웅'에 대한 단편소설, [심판과 유적]의 테마
제3단계는 '사랑'이다 : 최초의 인간, 동 파우스트, 네메시스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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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 주기에서 반항의 주기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의 주기라 불리는 제3단계의 작품들. 하지만 아쉽게도 이 3단계의 작품들은 1960년 1월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함으로써 작품의 형태로는 우리에게 보여 지지 못했다. 그의 미완성 소설 ‘최초의 인간’과 ‘작가수첩 3’에 나온 3단계 작품에 관한 여러 메모들이 전부이다.

그래서 한때 나는 이렇게 침묵 위에 떠 있는 말들의 섬들을 토대로 카뮈가 말한 ‘사랑’이 무엇인지 추론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고려대 김화영 교수가 ‘최초의 인간’의 해설에 언급한 말이 있다.

"1960년 이후 카뮈는 이제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 그는 온갖 사람들에 의하여 복권되었다. 로브 그리예는 그를 누보로망의 선구자라고 했고 신 철학자들은 그를 등에 업고 나왔다. 정신적 태도가 유사했는데도 68년의 젊은이들이 카뮈를 더 많이 들먹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롤랑 바르트와 질 들뢰즈 경우가 특히 그렇다. 바르트는 그의 저서 ‘글쓰기의 영도’에도 백색의 글쓰기 즉, 중립적인 파롤이라 칭하며 이상적인 글쓰기의 전범으로 카뮈의 글들을 중요하게 여겼고, 들뢰즈의 경우 그의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다양성과 긍정, 창조의 개념들은 이미 카뮈가 여러 작품들을 통해 유사한 형태로 언급했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한 인간이 이룩한 작품이란, 예술이라는 우회의 길들을 거쳐, 처음으로 가슴을 열어 보였던 한두 개의 단순하고도 위대한 이미지들을 다시 찾기 위한 기나긴 행로에 지나지 않는다." - '안과 겉' 중에서

내가 알베르 카뮈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와 같이 결산과 정리의 취향이 강한 그의 성향 때문이다. 나 또한 어느 순간이 되면 지난 삶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다시 모색하는 시기를 갖는다. 그리고 어느 경우 그런 시점은 개인적으로 중요한 시점이기도 했거니와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학교를 졸업한다든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등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와 겹치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에 다른 것을 덧붙이기도 했다(그럼에도 근본적인 방향에 대한 일관성은 항상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때론 그런 순간이 갑작스레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동안 나도 모르게 누적되어 오던 것이 한 순간에 드러났기에 그렇게 느끼는 수도 있겠다.

나를 둘러싼 세계의 밀도가 높아져 가끔 숨이 막히고, 그것을 낮추려고 애쓰거나 감추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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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영 개운치가 않다. 오히려 그로 인한 실수 때문에 밀도가 더 높아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지난 그동안 내가 한 일, 삶의 방식, 타인에 대한 태도 등과 같은 것들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것이고 '이젠 더이상 참을 수 없어요!'라고 자기 고백을 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산과 정리의 기간이 짧거나 길수도 있을 것이고, 뚜렷한 결과가 나오거나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지금과 달리 급격하게 변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꼭 신상에 대단히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으로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한동안은 차분하고 조용히 그리고 진지하게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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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과 가치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을 때 무엇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고려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올해 들어 제 나이도 벌써 서른다섯이고, 직장 생활도 9년차에 접어듭니다. 이맘때쯤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실적인 관점에서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기 마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우리가 대학에 막 들어갔을 시점인 스물 살때의 고민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한동안 저는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솔직히 말하면 현실적이고 물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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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성공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늘 생각했던 것 같고요. 스스로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점점 일반적인 삶과 생각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치에 더 매력을 느끼고 끌리는 감정을 부정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가능한 일을 할 때보다 그것이 제가 잘하든 못하든 잘 알든 모르든 간에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일을 할 때 더 기쁘고 마음이 가벼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가치 있는 일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로 바꾸려는 노력, 그리고 바꿀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가능성과 가치를 동시에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해도 한 쪽으로만 쏠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능성에 가치를 부여하든, 가치에 가능성을 부여하든 양 쪽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를 최소한 한번쯤은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지만 제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금과 같은 생각과 고민이 아니라 정말 그러기 위해 무엇을 했느냐 입니다. 선택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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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음악사에서 60년대 주류쪽을 대표했던 밴드가 비틀즈였다면, 비주류쪽은 단연코 벨벳 언더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들이, 이후 록음악계 미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90년대 얼터네티브, 그런지, 모던 록 그리고 그 이전의 펑크 록 밴드까지 모두 벨벳 언더그라운드에게 두 손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입니다.

"따거!"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들은 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록 밴드 순위에서 항상 상위권에 속할 만큼 여전히 즐겨듣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자주 찾았던 중고 레코드 전문점에서 우연히 그들의 첫 앨범인 'Velvet Underground & Nico(일명 바나나 앨범)'을 구입한 것이 첫 만남이었습니다. 아마도 팝 아트의 대가인 앤디 워홀이 매니징을 했다기에 궁금해서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만해도 생소했던 그들의 몽환적이고 음울한 사운드에 (과장을 좀 한다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지요.

아무튼 제가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처음 접할 때만 해도 록 음악을 많이 들었다는 주변 사람들도 이들의 존재를 아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로 생소한 밴드였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아마도 '접속'이라는 영화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이 영화에는 지금 소개하는 그들의 세 번째 앨범에 수록된 'Pale Blue Eyes'가 삽입되어 영화와 더불어 인기를 끌었고, 특히 영화의 주인공과 첫 사랑을 연결해 주는 소품으로 이 앨범이 등장합니다.

사실 이 앨범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실험 정신을 주도했던 존 케일이 빠진 상태에서 제작한 것이기에 제가 들었던 이전 곡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 앨범 중에 가장 편하게 들을 수 있을 만큼 전통적인 록 음악에 가까운 앨범이기도 합니다.

Candy Says와 Pale Blue Eyes 그리고 What Goes On과 Jesus 등을 한 번 들어보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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