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인 삶(외면일기)'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08/06/26 모과
  2. 2008/05/30 인생은 야구다
  3. 2008/03/05 선택의 기준
  4. 2008/02/25 (사람과 사람) '관계'에 대한 짧은 단상
  5. 2008/01/28 여행이란... '남애'를 추억하며
  6. 2008/01/08 오늘의 커피... 그리고 기다림
  7. 2008/01/04 인연
  8. 2005/11/28 잊고 있던 사람들
  9. 2005/11/26 기분 전환이 필요해
  10. 2005/11/01 그럼에도 모든 시작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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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하이텔이라는 PC통신을 통해 우연치 않게 알게 된 한 분이 내 삶의 질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나보다 2살이 연상이었다. 그리고 매섭게 추웠던 겨울날, 나는 한참동안을 오지 않은 그를 기다렸던 것 같다.

전해 준 음악을 들으며. 아... 이 사람의 삶의 질감은 이러하구나... 조금은 축축하고 또 덥다가 다시 싸늘히 식고... 그러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주었다. 그는 덧붙이기를 언젠가 퇴근하는 길에 1000원 짜리 모과 하나를 사서 방에 두었다고 한다. 모과를 그렇게 나두면 곧 썩어 들어가고... 그렇게 썩어가는 탈진의 상태에는 그 향내가 더 한다고 했다. 몸이 망가지며 이루어내는 자기 향내.... 곱씹어 보고 이룩해야할 지표가 아닐까라고...

木 瓜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의지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亡身의 사랑이여!

-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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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첫 직장생활을 했던 P모(지금은 종간됐다)라는 잡지를 함께 만들었던 선배의 미니홈피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사실 오래 전에 올아왔던 것인데 잊고 있다고 오늘 다시 읽게 됐네요. 그 선배 왈, 자신의 타율이 1할이라고 푸념을 늘어 놓았는데... 그렇담 전 과연 몇 할 정도나 될까요? 1할도 안되는 몇푼....심지어...몇리...? 특급 투수의 방어율 수준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고심하던 한 유대인이 고명한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상담을 하였습니다.
 
“모든 일이 계획한 절반도 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하던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뉴욕타임즈 1970년 연감 930페이지를 찾아보십시오. 그곳에 그 지혜가 적혀 있을 것이요.”
 
그러자 그 유대인은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허겁지겁 연감을 구해 읽어보니 유명한 야구 선수들의 타율만 나열되어 있을 뿐, 특별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줄 지혜가 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다시 랍비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사상 최강의 타자로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선수의 타율이 얼마로 적혀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연감에 의하면 그 선수는 타이 콥이라는 사람인데 그의 타율은 3할 6푼 7리로 나와 있었습니다. 랍비는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세계 최강의 타자도 평균 3타석 1안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계획한 일마다 절반 가까이 성사된다고 하니 그것은 5할대의 타자가 아닙니까? 만약 모든 야구선수들의 타율이 10할 대라면 무슨 재미로 야구를 하고 또 야구 구경을 하겠습니까? 인생도 야구와 같은 것입니다. 모자람 속에서 세상을 사는 의욕과 재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글에 대한 선배의 코멘트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3할도 못칠꺼면서 이루지 못할 10할 인생을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강요하며 살고있는건 아닐까? 한번의 실수에 너무 연연하지말자. 어차피 10번 중 7번을 실패해도 성공한 인생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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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과 가치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을 때 무엇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고려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올해 들어 제 나이도 벌써 서른다섯이고, 직장 생활도 9년차에 접어듭니다. 이맘때쯤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실적인 관점에서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기 마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우리가 대학에 막 들어갔을 시점인 스물 살때의 고민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한동안 저는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솔직히 말하면 현실적이고 물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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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성공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늘 생각했던 것 같고요. 스스로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점점 일반적인 삶과 생각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치에 더 매력을 느끼고 끌리는 감정을 부정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가능한 일을 할 때보다 그것이 제가 잘하든 못하든 잘 알든 모르든 간에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일을 할 때 더 기쁘고 마음이 가벼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가치 있는 일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로 바꾸려는 노력, 그리고 바꿀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가능성과 가치를 동시에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해도 한 쪽으로만 쏠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능성에 가치를 부여하든, 가치에 가능성을 부여하든 양 쪽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를 최소한 한번쯤은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지만 제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금과 같은 생각과 고민이 아니라 정말 그러기 위해 무엇을 했느냐 입니다. 선택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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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활히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때는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지요. 모든 작업을 혼자 처리해야 하는 경우라면 물론 편하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일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과 관계는 맺기 마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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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종종 느끼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상식적이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고, 자신의 의지와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의지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또한 매번 자신과 맞는 사람과 일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때론 함께 하기 싫은 사람과도 겉으로는 웃으면서 같이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요. 특히 그것이 수평적인 관계이거나 내가 갑의 위치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을의 입장이라면 매우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리고 책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의 관계를 좋게 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처한 현실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것은 단지 일반적인 패턴을 정리하여 컴포넌트화하거나 모듈화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그것만으로 모두 경우를 해결할 수 있다면 세상 살기에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런 기대는 애당초 안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결국 각자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통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대처해 나가는 수  밖에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모가 많은 돌멩이 같은 사람들에겐 이는 늘 어려운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라 여겨지는 것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로 인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어떤 이들과는 소원해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일을 망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꼭 무슨 자존심의 발로 같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소원해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관계 회복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레 잊는 경우도 있거나와 굳이 애써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에게 맞지도 않은 원칙을 지키고 싶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원칙이 꼭 올바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에도 잘못된 요소들은 분명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고쳐질 수 있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지적은 그들 역시 겸허히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은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꼭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 말은 마찬가지로 적용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과연 같은 곳을 바라는 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 것이며, 그런 사람과 어떤 일을 함께 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일을 하고 있거나 할 수 있다면 일의 정도를 떠나 그것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을까 싶네요.

* 삽입된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의 '좋은 관계'(1967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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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관계, 사람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사물을 보지 않는다.  주위에 있는 사물을 이용할 따름이다. 사물들의 도구성, 쓰임새에 국한되어, 그 쓰임새 밖의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행은 때로 그 쓰임새를 지운다. 그래서 새롭게 보인다. 또한 우리는 여행을 통하여 평소에 흔히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못하는 사물의 진실성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 순간적으로 다가오듯이, 여행의 시작도 순간적입니다. 문학평론가 故 김현은 떠나기 위해서 떠나는 여행만이 여행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떠나는 것이지요. 아무런 계획도 목적도 없이, 발길 닫는 대로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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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반복적인 생활. 아무런 의미 없이 기계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도시 생활. 그러한 삶에 지쳐버린 한 사람이 어느 순간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알 수 없는 충동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강렬하고 간절한 것이기에, 그는 주저 없이 떠납니다. 남은 일이야 어찌되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여행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자에겐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배제됩니다. 단지 마음을 투명하게 비워 놓고 있는 그대로의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물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곳에 또 왔냐고?
 글쎄, 최소한 여기서는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되거든


남애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 아무런 장식 없는 집
 이 곳에 와서 곱씹어 보니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사람들은 얼마나 잔인했던가
 자신보다 나은 자에게는 굽실거리고
 동등한 자에게는 시기를 하고
 못한 자에게는 가차 없이 대하고
 그러면서도 ‘사랑’을 말한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별과 바다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었든가
 말도 안 되는 허영심과 과시욕조차 부끄럽다
가만히 누워 별을 헤아려본다
 저 별 속에서라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고
 저 별 속에서라면 두려움조차 없을 것 같고
 저 별 속에서라면 내 치명적인 약점조차 용납될 수 있을 것 같다.


 저 별이 인도하는 곳
 설사 잘못된 것이라도
 그것이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숙명이라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별이 된다는 전설에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을 힘을 다해 싸워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당한 처사들, 불의의 것들, 사랑을 저버리는 모든 행위들에 대해
 설사 패배할 수밖에 없다 해도
 더 이상 비굴해지고 싶지는 않기에


 어느 순간
 나 역시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 날
 쓸쓸히 이 자리에 다시 서게 된다 해도
 저 별 속에서라면 죽음조차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해'라고 써야하는 것을 잘못 썼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동해의 주문진과 하조대 사이에 '남애'라는 곳이 정말 있습니다. 한때 제가 가장 아끼는 바다라고 칭했던 곳입니다. 무작정 떠난 여행길에 우연히 그곳을 발견했고, 저는 어느 낯선 바위 위에 올라서서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트에 이와 같은 글을 단숨에 적어 보았습니다. 오랜 전 일이고 글이었음에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새삼스레 다시 이 글이 떠올랐고, 가슴 속 깊숙한 곳에 묻어 둔 잊고 있던 무언가가 다시 소용돌이치는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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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남애, ,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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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약속 장소는 늘 스타벅스(정확히 말하면 스타벅스로 대변되는 커피전문점)이고, 항상 제 시간보다 일찍 나가 '오늘의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 것이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떤 약속이든 늦는 경우가 거의 없는 저로서는 기다림의 시간을 나름대로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면서 최적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다 주는 따스함의 문제"라고, 리차드 브로티간은 자신의 작품 어딘가에 쓰고 있으며, 하루키는 커피를 다룬 글 중에서 이 문장이 제일 흡족스럽다고 하네요. 커피를 즐겨 마시지 않는 저로서는 스타벅스의 커피 맛이 좋다기 보다는 무료할 수 밖에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평온한 시간으로 바꿀 수 있는 그 따뜻함에 매료됐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커피 한 잔이 ‘기다림’의 시간을 평온하게 만든다고 했는데 ‘사랑’에 있어 기다림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프랑스 문학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사랑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저작인 '사람의 단상'에서 한 구절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기다림이란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별 대수롭지 않은 늦어짐으로 야기되는 고뇌의 소용돌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늘 발생하는(설사 자신들은 cool한 관계라고 해도 결국에는 숨기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 등의 감정들도 따지고 보면 앞서 언급한 '별 대수롭지 않은 늦어짐'으로 나를 기다리게 만들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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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래전에 읽은 피천득의 ‘인연’이 생각나서 책장을 뒤졌습니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가급적이면 책을 구입해서 읽으려고 했지만 친구나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경우도 빈번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읽었던 모양입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인연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동명의 이 수필집이 떠오른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간절히 인연이 되기를 원해도 그렇게 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내게 다가온 인연도 스스로 저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알 수 없고 풀지 못하는 고민은 쌓여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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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인연

이번 주 일요일에 결혼하는 선배와 2여년 만에 만나 청첩장도 받을 겸해서 점심을 같이 했다. 지근거리에 있었음에도, 다시 말해 물리적인 거리는 그렇게 가까이에 있었음에도 오랫동안 멀어져 있었다. 심지어 메신저로 늘 연결되어 있었지만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어느 순간 연락을 주고받은 것도 자연스레 잊혀져 갔다. 아마도 그 선배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먼저 알리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런 상태는 지속됐으리라.

생각해 보면 결혼한다는 소식이 가끔 이렇게 잊혀져 갈 뻔한 옛 친구 혹은 동료를 다시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결혼할 때가 되니 연락한다고 불평을 할 수도 있겠지만(정말 그런 경우가 가끔 있기도 하고 그럴 땐 조금 난감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이를 빌미로 다시 연락하게 되고... 다시 만나고... 그리고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경우도 있다. 종종 쓰는 표현이지만 오래 전 잃어버려 이제는 잊고 있던 물건을 우연치 않게 다시 찾았을 때 느끼는 기분이라고 할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그리고 군대... 그렇게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들... 그리고 그때는 나름대로 친하다고 여겼던 이들 중에서도 지금 생각하면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생김새조차 기억이 안날 정도로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설사 길거리에서 마주친다 한들 서로 알아보지 못한 체 그냥 스쳐 지나는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

집에 들어와 책상 서랍 속 깊숙이 놓여 있던 졸업 앨범과 옛날 사진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사진을 보니 그래도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기억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사진 속에 함께 있던 이들 중 몇몇의 이름은 “아! 젠 OO였지”하며 나지막이 되뇌게 되고, 동시에 그들과 함께 겪었던 여러 에피소드들도 새삼스레 떠오른다. 하지만 어느 경우 내가 왜 저들과 빛바랜 사진 속에 같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낯설기도 하거니와 지금과 전혀 다른 내 모습이 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연말을 맞이해 여러 송년회 일정들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고 그 중에 대학 동기 모임도 있다. 생각해 보니 대학 졸업한 이후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들과 일부러 등지고 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상처가 깊을 정도로 그럴만한 사정은 있었으나, 그것조차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판단하건데 다 부질 없는 짓이었다. 그냥 다른 추억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단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까지는 관성처럼 그냥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외면한 채 지낸 것 아닌가 싶다.

결혼 소식처럼 송년회라는 빌미로 역시 대학 시절 잊고 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번에 굳이 피할 이유도 외면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이제는 대수롭지 않을 것 같다. 몇몇 곤혹스러운 기억들이 있다 한들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까지 애써 부정할 필요까지는 없으니 말이다.

어느 누구의 말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한 없이 잘하지만 반대로 도저히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어느 순간에 이르면 냉정할 정도로 무관심해져 버리는 양극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도 늘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아닐까.

순간 잊고 있던 그리고 잊혀진 사람들에 대해 (이유야 어찌됐든)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내 잘못이 더 큰 경우였는데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해 소원해져 잊혀졌다면 더더욱 그럴 것 같다. 물론 잘잘못은 상대적이기도 하거니와 사실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도 없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늘 자기 합리화를 하려는 본능적인 속성이 있기에 나 역시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렇게 인연을 만들고... 어느 순간 어떤 인연은 잊혀지고... 또 다시 다른 인연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식으로 희노애락을 반복적으로 겪어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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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도 열정도 없이(혹은 ‘안 생기거나 생길 일도 없이’) 단지 의무감 때문에 어떤 일을 할 때가 있다. 주로 본업에 상관없이 특정 목적을 위해 하는 일이 그렇다. 문제는 이런 특정 목적이 내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 자체가 아니라 일을 위한 목적과 방식들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살아가기 위해서는 특정 목적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안다. 그리고 그것에 타협하지 못할 정도로 꽉 막힌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생활의 발견) 대사처럼 “최소한 인간은 되지 못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서는 본업에서 조차 의욕과 열정이 자꾸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던 차라 이런 일들은 나를 더욱 지치게 한다. 책임 면피만을 위해 하는 일처럼 괴로운 것이 또 있을까? 마치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주변의 이러저러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는 느낌이랄까(이런 것을 훌훌 털지 못하는 것도 용기 부족이라고 질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과감해 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아무튼 내일이면 이런 일 중의 하나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 일 자체는 한때는 나름대로 의욕적으로 했던 것이라 자꾸 마음에 걸린다. 왜 이번엔 이렇게 꼬인 것일까, 나에게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의 불편한 감정이 다른 모든 것에 전염되는 것은 아닐까 등 이런 생각들이 마음을 심난하게 한다. 정작 일이 끝난다고 해도 지금의 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한동안 지속될 듯하다.
 
차분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나 자신과 주변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또한 사랑에 대해... 무엇보다 스스로의 미래에 대해... 다시 정리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몇 달 째 새벽 마감이다. 9월에는 새벽 3시... 10월에는 새벽 4시... 이번 달은 그나마 조금 빨라져 새벽 1시다. 이렇게 새벽에 마감이 끝나면 몽롱한 상태와 더불어 집에 가기 바쁘다. 흔히 쫑파티라고 하는 마감 후 동료들끼리 피곤함을 달래며 술 한잔하는 여유도 없는 것이다.
 
퇴근길, 평소 다니는 길이 아닌 곳을 선택해 집으로 향했다. 오래전부터 나는 등하교 할 때나 출퇴근 할 때 동일한 코스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대학 다닐 때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는데, 집에서 학교까지 갈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섭렵했던 것 같다. 그때는 학교가 수원에 있었기에 등하교할 수 있는 방법의 가지 수도 다양했다. 물론 걸리는 시간은 천차만별이었지만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내겐 별로 상관이 없었다(보통 2시간에서 2시간 30분정도였지만 심한 경우 4시간까지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취업을 한 이후에는 그런 경우가 많이 줄긴 했고, 특히 출근길에는 제 시간에 와야 했기에 늘 동일한 방법으로 다닌다(얼마 전 출근길에 충동적으로 다른 코스로 왔다가 엄청나게 지각을 한 이후로는 가급적이면 자제하기로 했다). 하지만 퇴근길의 경우 설사 많이 돌아가는 길이라도 일부러 다른 코스로 다니려고 지금도 애쓰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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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에 대한 권태로움과 낯선 것에 대한 본능적인 설렘. 물론 그동안 큰 변화에 대해서는 많은 경우 주저했지만 이렇게 작은 형태의 습관은 10년이 넘게 변함이 없다. 무언가 새로운 경험과 인연에 대한 막연한 기대 때문에 오랫동안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늘 다니던 강변북로를 뒤로하고 잠수교를 넘어 남산으로 향했다. 새벽 서울의 야경은 깊은 침묵에 휩싸여 날씨처럼 매우 싸늘하고 쓸쓸해 보였다. 잠시 차를 세워 담배 한 대를 피운다. 내뿜은 연기는 공기 속 사방으로 금세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새벽의 찬바람이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바뀌어 가슴 속 깊이 파고든다. 근처에 분위기 괜찮은 바(bar)가 있다면 술 한 잔 하고 갈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심호흡 몇 번에 마음을 다독거리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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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무런 욕심과 부담감 없이 글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동시에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따라서 이 블로그는 내게 있어 나도 잘 모르는 만인에게 공개된 ‘일기’와 다를 바 없겠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글에 대한 욕심이나 매달 기사 마감에 대한 부담이 없이, 그렇게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내 내/외면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에 대해 매일 매일 하나씩 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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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지만) 늘 무언가 시작할 때는 거창하게 말하곤 한다. 하지만 조금 지나고 나면 은근슬쩍 꼬리를 내리거나 자취를 감추거나 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은 늘 반복된다. 나 역시 그동안 이런 말과 글을 했던 경우가 몇 번이었던가.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적어도 무언가를 바라거나 의무적으로 해야 되는 것이 아니기에... 단지 내 마음이 내게 시키는 것만을 따를 뿐이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그렇게 말이다.

장 그르니에가 '공의 매혹'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조그마한 일에 쉽게 상처를 받곤 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사람들에 대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다 해도) 나름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여기기에 그것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상처나 고통이 마치 내가 그러한 것처럼 여겨지니 어쩌겠는가. 물론 다른 이들에게 무심한 채 나만의 영역 안에서 안주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최소한 나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누군가 지적한대로 그것은 지나친 염려 혹은 미련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도저히 "그러려니 하며" 체념한 듯 여기기는 싫었다. ‘체념이란 것’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을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하긴 때로는 내 이러한 태도로 인해로 인해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긴 했다.
 
만일 어떤 물음이 다른 물음보다 더 절박하다고 할 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까?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한 사람이 마땅히 뒤이어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할 행동이야 말로 바로 그 판단의 기준이라고 말하고 싶다(사실 이 말은 처음 한 것은 독일 철학자 니체이다).
 
솔직히 이놈의 세계가 몇 개의 범주로 이루어져 있든 그리고 진리가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인지……. 이런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가 오로지 관심을 가지는 단 한 가지의 신념은 ‘인간적인 사랑’에 대한 믿음뿐이다. 그냥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최소한 지켜야할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믿음. 사실 그것을 참을성 있게 지속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잘 알기에…….

이것이 누가 뭐라 하든 그리고 인정하고 아니고를 떠나 내가 살아나가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사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막연한 내일에 대한 아니 어쩌면 오늘도 이 도시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별과 달과 함께 지새우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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