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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독립영화상영관의 7월 상영작 중 국내 단편 애니메이션 "아빠가 필요해"가 있더군요. 네이버 메인화면에 등재되어 있기에 알았습니다.
 
원래는 지난 2005년 말에 한국독립영화협회와 민중언론 참세상이 함께하는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의 8번째 작품으로 소개되었던 애니메이션입니다. 일본 신카이 마코토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이후 오랜만에 발견한 훌륭한 단편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했었죠.
 
이 단편은 인간처럼 소설을 쓰는 늑대와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른체 생겨버린 여섯 살 딸, 토끼, 바다거북이 그리고 냉장고 안에 있던 사슴이 함께 만들어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B급 좌파'의 저자 컬럼리스트 김규항은 이 애니메이션을 "하야오 만큼 서정적이지만 골계(comic)에선 한수 위"라고 밝히고 있고, 이 작품을 처음 알게 해 준 지인은 자신의 블로그에 “인생 경험도 짧고 생각도 얕은 나로서는 달콤하고 즐거운 10분간의 미소를 담을 수 있는 영화로 남는다. 당신은 당신을 그토록 원하고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곁에 있었던 적이 있나요? 당신이 꿈꾸던 이상과 당신 옆자리에 누워있는 삶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 작품은 엉뚱한 상상력과 위트가 돋보이고, 그와 동시에 주제를 담아내는 솜씨도 만만치 않습니다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원래 가난한 늑대와 부유한 여자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다는데 만약 그랬다면 조금은 진부해졌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지만 과연 문학이 삶보다 중요할까? 지금까지 인생에서 이토록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 적이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영희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 어쩌면 나는 진짜 영희의 아빠이지 않을까?”
 
어쩌면 누구나 누군가의 아빠일 수도 있고... 그렇게 되고 싶다는, 그리고 그것이 그 어떤 위대한 문학 작품보다 삶을 가장 값지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인생의 큰 변화가 필요한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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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이 아무리 별 볼일 없다고 평가하더라도 혹은 긴 시간 내내 참을 수 없이 지루하더라도, 단 하나의 장면이나 대사 때문에 감동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다른 모든 것은 그 하나를 위한 준비운동이었다고 속삭이듯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시간 마음 어느 한구석에 고이 남겨집니다. 언젠가인지 모를 쓰임새의 순간을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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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자전거를 탔던 신지는 마짱에게 묻습니다.

"우리들, 이제 끝난 걸까?"

마짱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소리내어 웃습니다.

"바보야! 아직 시작도 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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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레이가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았다.

"사진은 시간이 빛에 보내는 키스였다."

과연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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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레이의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여성을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비유한 작품이다. 만 레이는 자신의 애인을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장 오귀스트 앵그르의 <발팽송의 욕녀>의 모델과 비슷하게 포즈를 취하게 한 다음, 사진으로 찍고 인화된 사진 위에 바이올린 마크를 새겨넣었다. (명화 속의 삶과 욕망,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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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블로터닷넷 기사로 채택되었습니다.-

IT 기술이 발전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개념과 문화들이 정신없이 쏟아지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핑크빛일까요? 그리고 그 속에서 개인 정체성은 과연 존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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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였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이란 신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즉, 중세 어둠의 세계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빛의 세계인 근대로 넘어가면서 인간이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몽이 진행됨에 따라 오히려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에 빠져든다고 지적했는데,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문화 산업의 야만성을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런 문화가 자본주의의 논리와 결합되어 대다수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획일화시킨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컴퓨터 환경, 특히 PC 환경에서 이와 같은 계몽을 주도했던 것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였습니다. 80년대 이후 소프트웨어에 대한 개발자와 사용자에 대한 자유로운 권리가 금지되고, 동시에 IBM 호환 PC에 MS-DOS가 탑재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일반 사용자가 컴퓨터에 쉽게 접근하면서부터) 계몽은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32비트와 GUI 그리고 인터넷 사용을 위한 자체 통신 기능을 내장한 윈도우 운영체제의 등장과 이후 운영체제 시장에서 확대된 윈도의 독점적 지위는 그동안 진행되어 온 계몽의 화룡정점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는 새로운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전보다 더 강력하고 은밀한 형태의 야만성을 띄면서 인간을 통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들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신화화되어 나타나고 우리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세뇌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개성이라는 것도 이 틀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나는 남들과 다르고 나만의 것을 찾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과연 나만의 것일까요? 그들이 즐기는 문화가 과연 스스로 창조한 문화일까요? 아니면 온갖 매체를 통해 신화화되어 마치 그래야만 할 것 같고 그것이 마치 나만의 것처럼 느껴지는 문화는 아닐까요?

90년대 중반 이후 윈도 운영체제가 시장을 독점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어떤 분은 “빌 게이츠가 마련해 준 선물에 만족하다가 어느 순간 그에게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린 사용자로서 스스로 무력함을 실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그렇다고 사용자 입장에서는 대세를 거스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윈도우를 필적할 만한 강력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대세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계몽의 변증법』에 나온 표현을 빌자면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유다 너의 생명이건 재산이건 계속 네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후 너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될 것이다”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셈입니다.

컴퓨터 환경에서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이방인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무능력에 빠지거나 더 나아가 정신적인 무력증을 초래합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이방인들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거나 혹은 타협점을 찾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가 개인에 가하는 폭력을 극명하게 보여준 '이방인'(알베르 카뮈 작품)의 주인공 뫼르소는 살인을 했다는 것보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무덤덤했다는 사실에 더 비난을 받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존 사회의 틀에 동화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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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늘 '새로운 것', '참신한 것', '기발한 것'을 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틀을 유지하기 위한 반복적인 형태에서만 가능합니다. 현대 사회의 인간이란 단지 자본주의 사회의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라는 메타 시스템 속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현대 사회의 바람은 문화라는 상품이 어떤 식으로 제작하여 포장하고, 어떤 마케팅 전략을 세워 선보여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어떤 식으로 소비되는가를 다시 분석하여 재생산할 것인가?  이러한 순환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인간을 포함한 제반의 모든 것들은 단지 수단에 불과합니다(생산의 수단이고 소비의 수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주체성'이란 끼어들 틈도 없습니다. 앞서 인용한 말처럼 이 시대의 주인은 육체를 자유롭게 놓아두는 대신 곧바로 영혼을 공략합니다. 새로운 형태의 암흑시대인 것입니다.

하버마스는 '계몽의 변증법'을 보고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계몽을 빙자한 광기의 시대(나치즘, 파시즘 같은)를 '부정'과 '비판'을 통해 보여줬지만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사진 설명>
1965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호르크하이머 (앞쪽 왼편), 테오도어 아도르노 (앞쪽 오른편), 위르겐 하버마스(뒷쪽 오른편) -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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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오로지 의지의 명령만을 따르고, 한순간의 방심이나 결함도 허용하지 않고 감정과 세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이 작업이 착착 진행되어가는 이 모든 날들을 겪고 나서, 아! 그냥 자신을 맡긴채 손을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 어쩔 수 없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그 모든 시간 동안 나를 떠나지 않았던 저 비탄의 심장부로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건설되지 않는, 오직 무(無)이고 싶은, 내가 다듬어야 하는 이 작품, 너무나도 어려운 이 얼굴을 버리고 싶은 바람과 유혹 걷잡을 길 없었으니, 나는 사랑하고 있었고 아쉬워하고 있었고 욕망하고 있었고, 마침내 사람이었으니....... 여름의 황량한 하늘,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바다, 그리고 내민 저 입술." - 작가수첩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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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페스트'의 주인공 리외는 오랑시에 번진 염병(페스트)에 맞서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것을 신에게 기대기보다는 차라리 죽을 힘을 다해 싸워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이런 리외의 태도는 도스트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인 키릴로프는 "당신은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믿습니까?" 라는 스타브로긴의 질문에 "아니요,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믿습니다."라고 답한다(시지프 신화 참조). 

이 두 가지 예를 보면 니체에게 있어 신의 죽음이 카뮈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신이 되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이는 인간이 신의 경지로 승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부정이고, 나아가 신의 섭리에서 인간의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는 하나의 반역(?)의 성격을 지닌다.

카뮈에게 있어 실존은 순간마다 변하고 지속성이 없다. 또한 세계의 불합리와 인간의 합리의 의지 사이에 고통스러운  문제를 안고 있는 부조리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정이다. 하지만 카뮈는 하나만은 긍정한다(부조리에서 자살하거나 신을 향한 헛된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 카뮈에게 있어 긍정은 시지프가 그러하듯이 인간 개인의 불굴의 의지이다. 즉, 세계내에서는 무의미하지만 개인에게 있어서는 전부인 그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긍정은 곧 타인에 대한 긍정을 부르기 때문이다. 리외가 페스트를 퇴치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류애적인 사랑이다. 다시말해 자신의  존재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타인의 존재 또한 자신과 같다는 하나의 동질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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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지에 이르면 더이상 신의 개입을 불필요한 것이 된다. 이제는 신의 존재 유무에 관하여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카뮈는 삶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한 이것이 인간에 주어진 원초적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의 삶, 나의 반항, 나의 자유를 최대한 느끼는 것, 이것이 최대한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의 나는 곧 모든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 신을 고안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까지의 우주 역사의 요약이다."

신은 단지 인간이 극복해야 할 무엇이다. 그리고 이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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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오래 전 부터 좋아했고, 다른 많은 이들도 인정하는 명화(名畫) 2편을 소개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윌리암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입니다. 오랜 만에 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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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작품에는 물결이 소용돌이 친다. 별과 달이 춤을 추고 대지는 용솟음 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것들은 때로는 질풍노도와 같이 격동하고, 또 때로는 포근한 미풍과도 같이 일렁인다.

그는 인간의 내면성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 보인 화가이다. 집어삼킬듯한 폭퐁우와 그 이후에 올 평화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모순으로 가득찬 인간과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지만 그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빛을 동경하고, 빛의 순수성을 지키면서도 즉흥적이거나 정감적인 경향에 빠지지 않고 견고한 회화성을 되찾으려는 노력. 그의 작품에는 한단계 넘어선 색채의 혁명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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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너머로 자신의 일생을 성실히 마감한 태양이 마지막으로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하듯 서서히 넘어간다. 그렇게 바다 끝에 비친 석양은 온 화면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호젓한 풍경이고 비극적일지라도 오히려 더 할 것없이 생생하고 풍요롭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치 영원회귀를 꿈꾸듯이 말이다. 바다는 잔잔하며 하늘은 고요하다. 테메레르호는 머나먼 여정을 시작하지만 아무런 동요도 그 어떤 말도 없다. 그것은 침묵의 항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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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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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는 삶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항상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는 ‘결산과 정리의 취향’이 강한 작가였다. 다시 말해 그는 유행을 따르거나, 어떤 의도적인 목적으로 작품을 쓴 작가가 아닌 평생 일관된 주제를 갖고 끊임없이 노력한 향일성의 작가였던 것이다.

그는 “왜 사는가?”에서“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물음에 답해가는 과정에서 그의 성찰, 감수성, 행동 방식을 하나의 etage와 cycle로 나누었는데 그의 전 저작을 이와 같이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 제1단계 : 부정, 부조리, 자살 
  - 이방인(1942), 행복한 죽음 오해, 칼리큘라(1945) 시지프의 신화(1943)
* 제2단계 : 긍정, 반항, 살인
  - 페스트(1947) 정의의 사람들, 계엄령(1950/1948) 반항적 인간(1951)
* 과도기 혹은 3단계 이전 
  - 전락, 적지와 왕국(1954/1957)

그리고 ‘작가수첩3’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제3단계 이전 : '우리시대의 영웅'에 대한 단편소설, [심판과 유적]의 테마
제3단계는 '사랑'이다 : 최초의 인간, 동 파우스트, 네메시스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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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 주기에서 반항의 주기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의 주기라 불리는 제3단계의 작품들. 하지만 아쉽게도 이 3단계의 작품들은 1960년 1월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함으로써 작품의 형태로는 우리에게 보여 지지 못했다. 그의 미완성 소설 ‘최초의 인간’과 ‘작가수첩 3’에 나온 3단계 작품에 관한 여러 메모들이 전부이다.

그래서 한때 나는 이렇게 침묵 위에 떠 있는 말들의 섬들을 토대로 카뮈가 말한 ‘사랑’이 무엇인지 추론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고려대 김화영 교수가 ‘최초의 인간’의 해설에 언급한 말이 있다.

"1960년 이후 카뮈는 이제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 그는 온갖 사람들에 의하여 복권되었다. 로브 그리예는 그를 누보로망의 선구자라고 했고 신 철학자들은 그를 등에 업고 나왔다. 정신적 태도가 유사했는데도 68년의 젊은이들이 카뮈를 더 많이 들먹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롤랑 바르트와 질 들뢰즈 경우가 특히 그렇다. 바르트는 그의 저서 ‘글쓰기의 영도’에도 백색의 글쓰기 즉, 중립적인 파롤이라 칭하며 이상적인 글쓰기의 전범으로 카뮈의 글들을 중요하게 여겼고, 들뢰즈의 경우 그의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다양성과 긍정, 창조의 개념들은 이미 카뮈가 여러 작품들을 통해 유사한 형태로 언급했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한 인간이 이룩한 작품이란, 예술이라는 우회의 길들을 거쳐, 처음으로 가슴을 열어 보였던 한두 개의 단순하고도 위대한 이미지들을 다시 찾기 위한 기나긴 행로에 지나지 않는다." - '안과 겉' 중에서

내가 알베르 카뮈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와 같이 결산과 정리의 취향이 강한 그의 성향 때문이다. 나 또한 어느 순간이 되면 지난 삶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다시 모색하는 시기를 갖는다. 그리고 어느 경우 그런 시점은 개인적으로 중요한 시점이기도 했거니와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학교를 졸업한다든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등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와 겹치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에 다른 것을 덧붙이기도 했다(그럼에도 근본적인 방향에 대한 일관성은 항상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때론 그런 순간이 갑작스레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동안 나도 모르게 누적되어 오던 것이 한 순간에 드러났기에 그렇게 느끼는 수도 있겠다.

나를 둘러싼 세계의 밀도가 높아져 가끔 숨이 막히고, 그것을 낮추려고 애쓰거나 감추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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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영 개운치가 않다. 오히려 그로 인한 실수 때문에 밀도가 더 높아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지난 그동안 내가 한 일, 삶의 방식, 타인에 대한 태도 등과 같은 것들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것이고 '이젠 더이상 참을 수 없어요!'라고 자기 고백을 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산과 정리의 기간이 짧거나 길수도 있을 것이고, 뚜렷한 결과가 나오거나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지금과 달리 급격하게 변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꼭 신상에 대단히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으로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한동안은 차분하고 조용히 그리고 진지하게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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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말에 의하면 시지프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신중한 자였다. 그러나 또 다른 설화에 의하면 그는 강도가 직업이었다고 전해진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그가 지옥에서 무용한 노동을 하도록 벌 받게 된 원인에 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첫째로, 그는 신들을 대함에 있어서 경솔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신들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이다. 아조프의 딸 에기나는 주피터에게 납치되었다. 딸의 실종에 놀란 그의 아버지는 시지프에게 사정했다. 이 납치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던 그는 코린트 성에 물을 대어 준다면 아조프에게 비밀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하늘의 노여움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물의 혜택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받았다. 호메로스는 또한 시지프가 사신(死神)을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플루톤은 텅 비고 조용하기 만한 그의 왕국의 정경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쟁의 신을 급파하여 사신을 승리자의 손에서 해방시켰다. 또 전하는 이야기로는 시지프는 죽을 때가 가까워 오자 경솔하게도 아내의 사랑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 명하기를, 자신의 시체를 묻지 말고 광장 한복판에 내다 버리라고 했다. 시지프는 지옥에 떨어졌다. 이렇게 되자 인간적 사랑을 저버린 채 시킨 대로  복종한 아내에게 분격한 나머지 시지프는 아내에게 벌하려고 플루톤에게 지상으로 되돌아가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이 세상을 다시 보고 물과 태양, 따뜻한 돌들과 바다의 맛을 보자 그는 지옥의 어둠 속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수차례의 걸친 소환, 분노,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여러 해 동안 그는 둥글게 굽은 만과 눈부신 바다 그리고 미소짓는 대지를 눈앞에 보며 살았다. 이렇게 되자 신들의 판결이 불가피했다. 메르쿠리우스(주피터의 아들이고 제신의 사자)가 와서 이 뻔뻔스러운 자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그를 쾌락에서 끌어낸 다음 굴려 올릴 바위가 준비된 지옥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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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는 끊임없이 바위를 끌어올려야만 하는 영겁의 형벌을 받는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무용한 일. 그가 만약 이 형벌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그는 별 볼일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뛰어난 성실성을 가르쳐 준다. 시지프는 침묵하지만, 자신의 긴장된 온 몸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라는 부정의 질문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항상 인간의 편에 선다. 그가 만약 인간에게 등을 돌리고 신에게 향했더라면 그는 언제든지 이 고통스러운 형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신의 편에 서지 않았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고통보다 인간에게 주어진 불의를 참을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결국 시지프는 불행했지만, 옮았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어느 누구도 죽음의 운명을 피해 갈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고통스럽다. 내일 당장 끝장 나 버릴 수 있는 하루하루.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차라리 쇼펜하우어가 그렇듯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하루빨리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것을 인정하여 자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시지프는 죽어야만 하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 할 때, 그 조건을 부여한 영생의 존재로서의 신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인간 조건에 반항하고, 신의 영역에  도전하여 처벌을 받은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러한 시지프를 영웅의 자리. 승리자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인간이 결국 죽어야 한다는 사실과 세계라는 존재는 원래 부조리한 것이다. 시지프는 이 어처구니없는 세계에 도전했다가 부조리한 자신을 자각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 자각의 순간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 것이 된다. 그는 자신의 노동이 헛되고 부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위안을 삼을 만한 헛된 희망조차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슬픔과 비탄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신에 대항해 바위를 끌어올린다.

신들은 무익한 일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그에게 있어 이 일은 더 이상 고통도 무익한 일도 아닌 것이다. 그는 말한다. "고통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행복인가? 고통과 행복은 한 어머니의 두 아들이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고통은 시작되었지. 그리고 행복의 부름이 너무도 절실할 때. 고통은 우리 마음속에서 솟아나네, 이 참을수 없는 비탄은 너무도 힘든 것이지만, 이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의 영혼은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하네 그리고 나는 이 불확실과 고통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네. 다시 말해 나는 이 세상에 들어온 신들은 추방한 것이네."

그에게 있어 고통은 이제 행복으로 바뀐다. 신은 그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을 내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인 것이다. 물론 그 형벌이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겠지만 거기에는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바위와 시지프 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마치 도박과 같이 바위와 시지프의 일대일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그 곳에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만약 영겁의 형벌이 신의 것이라면 고통스럽겠지만, 바위와 시지프의 게임이라면 그것은 시지프의 다른 운명이고 기쁨인 것이다. ‘던져진 주사위는 우연을 단호하게 긍정하는 반면에,  떨어진 주사위는 필연적으로  수를 긍정하거나 주사위를 되부르는  운명을 긍정한다(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중에서)’

시지프의 영겁의 형벌은 이와 같이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이며 필연의 긍정이고 우연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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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들을 함께 되려오는 수이다. 처음으로의 회귀이고,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이며, 우연 그 자체의 재생산과 재 긍정이다. 시지프는 늘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이와 같은 의미에서는 그는 결코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니체의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면, 또한 시지프의 운명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았다면, 그의 의지는 새로운 창조 행위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질 들뢰즈가 지적 한대로 "그 자신의 영원회귀를 의욕할 것인 게으름, 어리석음, 천박함, 소심함 또는 악의의 감정 등은 더 이상 똑같은 게으름, 어리석음 등이 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주어진 상황, 주어진 순간 속에서 그로서는 가장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여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다.

삶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시지프가 끊임없이 바위를 끌어 올리듯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 말했듯이 내일 당장 자신의 삶이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것이다.  현재까지를 최대한 사랑한 것. 비록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다 해도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더 낳지 않을까?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이렇게 마무리함으로서 끝맺었다. 즉,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며, 포기하느니보다는 분투하는 게 더 나으며, 어쩌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에는 우연히 눈에 띄게 될 아름다움과 구제되어야 할 고통들, 달성되거나 칭송돼야 할 고상한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겉보기의 무익함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의 궁극적인 패배를 인정하는 동안에도 인생에 담긴 도전들과 책임들을 맞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 듀랜트, ‘문학이야기’ 중에서-

카뮈가 시지프를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명철한 의식, 반항과 열정이다. 다시 말해 그는 시지프를 통해 세 가지의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적인 활동만을 통해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삶의 법칙들을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인간은 자살을 거부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시지프는 과연 지옥에서 받을 자신의 형벌을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신들의 소환 명령을 거부하고 이 지상에 남기를 원했다. 물론 그도 역시 언젠가는  지옥으로 끌려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순간이라도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마음껏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시지프는 그를 잡으러 온 메리쿠리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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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쿠리우스! 이리 와보게 저기 보이는 드넓은 해안선, 눈부신 바다. 그리고 대지의  미소가 너무도 아름답지 않는가. 작렬하는 태양 속에서 해변을 걸어 보게. 온 세계가 하얀 투명 빛으로 변하고 그 빛이 온 몸으로 다가올 때 느껴지는 현기증. 그 순간 한 번 크게 숨을 쉬어보게 그러면 살아 있음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테니..."

메르쿠리우스는 시지프에게 이 모든 지상의 것들은 신의 의해 창조되었고, 시지프가 느끼는 것은 신의 피조물을 즐기고 탐닉하는 것에 불구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지프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땅과 씨앗만 쥐어 준다고 해서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이 이 지상에 대한 온갖 정열 그리고 끊임없는 사려를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서 모든 신들을 침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옥에 끌려갈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이 지상에서 사랑해야 할 것들에 대해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설사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해도, 그는 살아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사랑하고자 한 것이다. 결국 지옥에서의 고통스러워하는 시지프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것에서 비롯된다. 그는 포기하지를 않는다. 지상의 것들을 사랑한 것만큼, 그 거대한 바위 역시 사랑의 대상이 된다. 그럼으로써  바위를 끌어올리는 작업이 더 이상 무익한 작업이 아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 최대의 작업이 아니었을까?

그는 바위를 통해 하나의 창조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물질적 이미지들이다. 시지프가 찬탄해 마지않는 대상들은 하나같이 물, 태양, 대지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 신화가 상징적 체계라면 과연 시지프에게 있어 물질적 이미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세계를 변화시키려면 우선 나 자신이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바슐라르의 이미지의 현상학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이미지의 생성은 즉, 이미지가 표상  하는 대상, 이미지가 표상하는 외계의 변화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존재의 생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시지프가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 느껴던 것들은 바로 가스통 바슐라르가 ‘경탄(공기와 꿈)’이라 부르는 영혼의 상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 안에서 마치 자신의 집에 있는 것 같은 인상’ 혹은 ‘세계가 일체의 적대적인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인 것이다. 결국 시지프는 세계의 사물들을 사랑함으로써 세계를 예찬한 것이다. 그럼 이러한 것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사랑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의 생성을 만드는 상상력의 참여, 즉 이미지가 표상하는 외계에 대한 우리들의 존재의 참여를 가능케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의 척도로서 이미지의 생성을 이끄는 원형은 바로 사랑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다. 바슐라르의 표현을 빌자면 세계를 믿고 세계를 사랑하고, 우리들의 세계를 창조하는데 우리들을 도와주는 저장된 열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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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내용을 다소 뒤집는 말이지만) 시지프는 결코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고통 받는 한 인간에 불구하다. 하지만 그는 고통이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있어서 사랑과 창조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시지프는 삶을 그리고 인간적인 것들을 너무도 사랑한 인간이었다. 카뮈가 지적했듯이 주인 없는 우주가 그에게 있어서는 불모의 것도 하찮은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에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우리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형벌은 받은 시지프를 통해 사랑과 행복이 무언지를 알아야한다. 그는 이를 고통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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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 같다.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너도 그 까닭을 알고 있을 것이다...(중략)...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나의 그 하나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내게 있어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더불어 너처럼 나의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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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알베르 카뮈의 이 작품을 '건전지의 발명'과 같다고 비유했으며, 그의 저서 '글쓰기의 영도'에서는 이상적인 글쓰기 전범이라 했다(중립적인 글쓰기 혹은 백색의 글쓰기라고 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겠지만 내게 있어 학창 시절 이 작품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정말 이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과 노력을 수없이 많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뫼르소와의 동질감, 즉 그때까지(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생각하고 느낀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뫼르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누구나 한번쯤 느낄법한 실존에 대한 고민이나 단순한 부조리한 감수성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통채로 바꿔버릴만한 충격이었다(실제로도 그랬다). 마치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쌍동이 형제를 만났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어쩌면 나는 아래의 그 유명한 마지막 구절과 같이 매순간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을 갈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이방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럴수 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 만에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왜 인생이 다 끝나갈 때 '약혼자'을 만들어 가졌는지, 왜 생애를 다시 시작해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뮈와 <이방인>
<L'etranger> de Camus
 
by 피에르-루이 레

● 형태를 알 수 없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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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속에서 우리는, 간혹 몇몇 사람들이 암시했듯이, 세계가 부조리하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을 찾아볼 수 있을까? -- [시지프의 신화]가 우리들에게 부조리의 <개념>을 제공했다면, [이방인]은 부조리의 <감정>을 제공하였다. 즉, 뫼르소가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감정>은 [시지프의 신화]에 나오는 부조리의 개념인 것이다. 하지만 만약 카뮈가 소설 속에서 그런 종류의 증명을 하고자 목표하였다면, 그 보다 더 나은 수단을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샤르트르의 [구토]가 바로 그것이다. [구토]의 로캉텡은 이 세계 속의 제자리를 바로 찾아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돌연, 그의 이성과 감수성의 요구에 부응하던 그 세계가 모든 실감(實感)을 상실한다. 말은 그 의미에서 벗어나 이상한 모습을 띄고, 존재들과 사물들은 수미일관한 비전 속에 편입되기를 그치고 완전한 무상성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로캉텡의 경우도 뫼르소처럼 자신이 이 세계에 대하여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것이요, 그가 <구토>라 부르는 것이 바로 그러한 감정인 것이다. 그렇지만 로캉텡의 눈에는 대상들이 고정관념적으로 다가들면서 문자그대로([구토]와 같이) 그를 미칠지경으로 만들지만 뫼르소는 아무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자연스럽게> 이 세계를 별 의미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뫼르소는 사르트르이 주인공과는 반대되는 변화의 경로를 밟아간다. 로캉텡에게는 상실되어가는 의미를 이 세계 속에서 점차로 발견해가게 된다. 하지만 뫼르소의 눈에는 <형태를 알 수 없는>것으로 비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우리는 재판이 시작되면서 부터 뫼르소의 감정세계가, 전에는 대상이 연상을 통해서만 생각나던 어머니가 점점 애정과 희망의 이미지로 다가가는 것을 볼 수있다.) [구토]에서는 세계가 <사물화(事物化)>하는데 비하여, [이방인]에서는 소설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세계가 인간적인 성격으로 윤색되어 가는 것이다. 즉, [구토]에서는 부조리의 <감정>이, 바로 견디기 힘들고 부정적이기는 해도, 인간주의적인 환상으로 은폐된 어떤 세계에 대한 승리로 나타나고 있다면, [이방인]에서 부조리의 감정은 출발점으로서의 가설이며, 일종의 백지상태로서 그 위에 장차 애정이라든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신뢰의 표시들이 새겨지는 것이다.

● 무엇에 대하여 [이방인]인가?
카뮈의 독창성은 자기 생각의 극한점까지 밀고 나가는데 있다. 그로서는 회의주의적인 숱한 격언들 수집하자는 게 목적이 아니다. 물론 두가지를 따로 놓고 보면 부조리란 인간 속에도 세계 속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세계내적 존재>가 인간의 근본적인 성격이고 보면 부조리는 결국 인간 조건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한 어떤 개념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 부조리를 계시하여 주는 것은 저 참담한 한순간의 번개처럼 스치는 정경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할 수 없는 명철한 의식에 이르게 된다면, 몇가지 근원적인 자명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이세계는 혼돈이며 사람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내일이 없다는 것이다.

● 알맹이가 없는 사회
우리는 [이방인]을 우리네 법률제도에 대한 풍자로 읽을 수 있다. 뫼르소에게 당신을 어떤 사람이요 하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쳐 주는 쪽을 택하고, 그는 남들이 피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미리 만들어진 관념을 말이나 태도에 의하여 확인해 주는 정도로 만족하기를 기대한다. 그는 미리 정해진 의식 속에서 맡겨진 역할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로 인해 사회적 유희에 차질이 생긴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뫼르소는 변호사와 검사를 서로 적수라기 보다는 공범자와 같이 본다. 그리고 인물들은 무슨 유리벽에 가려진 채 관찰되고 있어서 그들의 행동은 부조리해지고, 일종의 무언극으로 변모되고 만다. 뫼르소는 유리벽 저너머에 있는 한은 어떤 무심한 관객에 불과 했다. 하지만 이 세계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되면서부터,(뫼르소는 사기와 같은 내막을 폭로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그는 그 무언극이 계속되는 것을, 남들이 그를 무언극 속에 밀어놓겠다고 하는것을 견디지 못하여, 드디어는 반항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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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를 처음 읽은 것은 한창 군 생활 중이었던 97년 이 맘 때쯤이었습니다. 그의 다른 저작인 '콘트라베이스' 다음으로 연속해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저는 한 작가의 여러 작품들을 단번에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아무튼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부담 없는 분량과 중간 중간 삽입된 장 자크 상페의 그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성장 소설들이 그러하듯 이 책 또한 스펀지에 물 스미듯 가슴을 촉촉하게 채워주는 그 무언가 있었습니다.

제목과는 달이 이 책에서 좀머씨는 단지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 주인공은 작가 자신일지도 모를 화자, 유년기 시절의 한 소년입니다. 그는 나무타기를 좋아하며 '올림 바' 음에 코딱지가 붙어있다는 이유로 그 음을 치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발단이 되어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욕적인 오해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좀머씨 이야기'일까요? 주인공은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 좀머씨를 중요한 모티브로 개입시킵니다. 그리고 책 후반부에서 그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인생에 있어 두 가지 선택방식. 세상에 대한 복수와 세상 안에서의 영생. 좀머씨는 전자를 택해 결국에는 자살하지만 주인공은 자살을 거부하고 후자를 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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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씨와 주인공은 어쩌면 같은 의미에서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녔지만 결론적으로 다른 방법을 행합니다. 이는 그들의 세 번의 만남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세 번의 만남을 통해 주인공의 의식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주목해서 읽는다면 흥미로울 것입니다.

또한 긴 여운을 남기는 좀머씨의 한 마디 "그러니 제발 그냥 내버려 주시요” 좀머씨는 주인공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지, 결코 삶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던 것입니다(그 스스로 전자를 택함으로써 주인공은 후자를 택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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