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IT 관련 서적 중 간혹 프로그래머나 개발자를 다룬 서적을 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폴 그레이엄의 '해커와 화가'라는 책은 좀 독특합니다(제목 자체부터 좀 독특하지 않나요?). 일단 이 책의 저자인 폴 그레이엄은 리스프 세계의 매우 뛰어난 프로그래머였고, 야후 스토어의 전신인 '비아웹'이라는 스타트업 회사를 설립해 훗날 야후에 비싼 값(^^;;)에 판 다음 지금은 유유자적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컴퓨터 잡지 기자 생활을 하던 시절 간혹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가 대학 시절 제 전공이었던 인문학과 컴퓨팅 분야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는데... 역자도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이 그것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제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원래 생각한 것보다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이건 좀 아니다'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시각도 제법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저자는 "훌륭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의 스타트업 회사(우리 식으로는 '벤처')를 만드는 것이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타트업과 관련해 중요한 문제가 돈 벌어주는 소프트웨어와 내게 흥미로운 소프트웨어 사이에 별로 겹치는 부분이 없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너무나 짜증이 나는 일이라서 누구도 그것을 공짜로 해결할 엄두를 내지 않는 힘겨운 일을 찾으라고 충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비유를 합니다.

"오프-브로드웨이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은 박람회의 한 전시장에서 고릴라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다도 돈벌이가 적다. 소설을 쓰는 것은 쓰레기 처리와 관련된 광고 문구를 작성하는 것보다도 돈벌이가 적다. 그리고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떤 회사의 낡은(legacy) 데이터베이스를 웹 서버에 연결하는 것보다도 돈벌이가 적다"

저자는 이와 같은 경우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으로 임시직을 갖고 있는 오픈소스 해커의 예를 들긴 하지만, 그것을 단지 일종의 취미 차원으로 국한시킬 뿐입니다. 돈도 많이 벌면서 멋진 소프트웨어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오픈소스로도 그것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국내에서는 과연 누가 그런(이 책에서 많이 언급된 애플과 스티브 잡스와 같은) 선구자적 역할을 해 나갈 수 있을까요(혹은 가능할까요?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어떻게?) 등의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ielegy

-이글은 블로터닷넷 기사로 채택되었습니다.-

IT 기술이 발전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개념과 문화들이 정신없이 쏟아지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핑크빛일까요? 그리고 그 속에서 개인 정체성은 과연 존재할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였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이란 신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즉, 중세 어둠의 세계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빛의 세계인 근대로 넘어가면서 인간이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몽이 진행됨에 따라 오히려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에 빠져든다고 지적했는데,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문화 산업의 야만성을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런 문화가 자본주의의 논리와 결합되어 대다수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획일화시킨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컴퓨터 환경, 특히 PC 환경에서 이와 같은 계몽을 주도했던 것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였습니다. 80년대 이후 소프트웨어에 대한 개발자와 사용자에 대한 자유로운 권리가 금지되고, 동시에 IBM 호환 PC에 MS-DOS가 탑재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일반 사용자가 컴퓨터에 쉽게 접근하면서부터) 계몽은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32비트와 GUI 그리고 인터넷 사용을 위한 자체 통신 기능을 내장한 윈도우 운영체제의 등장과 이후 운영체제 시장에서 확대된 윈도의 독점적 지위는 그동안 진행되어 온 계몽의 화룡정점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는 새로운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전보다 더 강력하고 은밀한 형태의 야만성을 띄면서 인간을 통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들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신화화되어 나타나고 우리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세뇌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개성이라는 것도 이 틀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나는 남들과 다르고 나만의 것을 찾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과연 나만의 것일까요? 그들이 즐기는 문화가 과연 스스로 창조한 문화일까요? 아니면 온갖 매체를 통해 신화화되어 마치 그래야만 할 것 같고 그것이 마치 나만의 것처럼 느껴지는 문화는 아닐까요?

90년대 중반 이후 윈도 운영체제가 시장을 독점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어떤 분은 “빌 게이츠가 마련해 준 선물에 만족하다가 어느 순간 그에게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린 사용자로서 스스로 무력함을 실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그렇다고 사용자 입장에서는 대세를 거스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윈도우를 필적할 만한 강력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대세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계몽의 변증법』에 나온 표현을 빌자면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유다 너의 생명이건 재산이건 계속 네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후 너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될 것이다”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셈입니다.

컴퓨터 환경에서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이방인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무능력에 빠지거나 더 나아가 정신적인 무력증을 초래합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이방인들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거나 혹은 타협점을 찾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가 개인에 가하는 폭력을 극명하게 보여준 '이방인'(알베르 카뮈 작품)의 주인공 뫼르소는 살인을 했다는 것보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무덤덤했다는 사실에 더 비난을 받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존 사회의 틀에 동화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날 우리는 늘 '새로운 것', '참신한 것', '기발한 것'을 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틀을 유지하기 위한 반복적인 형태에서만 가능합니다. 현대 사회의 인간이란 단지 자본주의 사회의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라는 메타 시스템 속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현대 사회의 바람은 문화라는 상품이 어떤 식으로 제작하여 포장하고, 어떤 마케팅 전략을 세워 선보여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어떤 식으로 소비되는가를 다시 분석하여 재생산할 것인가?  이러한 순환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인간을 포함한 제반의 모든 것들은 단지 수단에 불과합니다(생산의 수단이고 소비의 수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주체성'이란 끼어들 틈도 없습니다. 앞서 인용한 말처럼 이 시대의 주인은 육체를 자유롭게 놓아두는 대신 곧바로 영혼을 공략합니다. 새로운 형태의 암흑시대인 것입니다.

하버마스는 '계몽의 변증법'을 보고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계몽을 빙자한 광기의 시대(나치즘, 파시즘 같은)를 '부정'과 '비판'을 통해 보여줬지만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사진 설명>
1965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호르크하이머 (앞쪽 왼편), 테오도어 아도르노 (앞쪽 오른편), 위르겐 하버마스(뒷쪽 오른편) - 출처 : 위키백과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ielegy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를 처음 읽은 것은 한창 군 생활 중이었던 97년 이 맘 때쯤이었습니다. 그의 다른 저작인 '콘트라베이스' 다음으로 연속해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저는 한 작가의 여러 작품들을 단번에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아무튼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부담 없는 분량과 중간 중간 삽입된 장 자크 상페의 그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성장 소설들이 그러하듯 이 책 또한 스펀지에 물 스미듯 가슴을 촉촉하게 채워주는 그 무언가 있었습니다.

제목과는 달이 이 책에서 좀머씨는 단지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 주인공은 작가 자신일지도 모를 화자, 유년기 시절의 한 소년입니다. 그는 나무타기를 좋아하며 '올림 바' 음에 코딱지가 붙어있다는 이유로 그 음을 치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발단이 되어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욕적인 오해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좀머씨 이야기'일까요? 주인공은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 좀머씨를 중요한 모티브로 개입시킵니다. 그리고 책 후반부에서 그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인생에 있어 두 가지 선택방식. 세상에 대한 복수와 세상 안에서의 영생. 좀머씨는 전자를 택해 결국에는 자살하지만 주인공은 자살을 거부하고 후자를 택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좀머씨와 주인공은 어쩌면 같은 의미에서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녔지만 결론적으로 다른 방법을 행합니다. 이는 그들의 세 번의 만남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세 번의 만남을 통해 주인공의 의식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주목해서 읽는다면 흥미로울 것입니다.

또한 긴 여운을 남기는 좀머씨의 한 마디 "그러니 제발 그냥 내버려 주시요” 좀머씨는 주인공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지, 결코 삶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던 것입니다(그 스스로 전자를 택함으로써 주인공은 후자를 택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ielegy

이 세상에는 그 시대의 목소리나 조류를 잘 대변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어쩌면 이에 속한 이들이 더 행복하리라), 때로는 극히 개성적이며 특출한 천재가 있어 당대에는 이해되지 못했지만 후세에 가서야 이해되고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들레르는 후자에 속하는 시인입니다. 그의 진가가 알려지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고, 수많은 오해와 비난, 박해 뒤에 비로소 근대시의 원조로 추앙됐기 때문이지요. 사진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노라면 넓은 이마에 강렬한 눈매, 꼭 다문 입에서 느낄 수 있듯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려는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마치 시대를 앞선 불운한 천재의 이미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온 생애가 시종 비참과 불행의 늪이었음을 알 수 있는 그의 시에 나타나는 우울과 슬픔, 절망감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에게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합니다.

보들레르는 그의 단 하나의 시집, ‘악의 꽃’으로 존재되고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시집이 출판되자마자 그는 풍속 문란이라는 죄명으로 처벌당합니다. 당시 비평계의 권위자이던 브륀느티에르는 "이 시집에서는 부도덕과 광기 외에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한권의 시집은 후세에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감동을 주어 시인들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는 그의 삶만큼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 평 또한 찬반양론이 극심하게 대립됐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시를 공감하고 혹은 비난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근대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자기의 고백을 통해 인간의 죄악, 비참, 슬픔, 외로움, 소망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나타냈고 고발했기에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그는 인간이 쓴 가면과 가식을 벗겨버리고, 적나라하게 인간 상황과 그 내면 세계를 깊이 파헤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시집은 단테의 ‘신곡’에 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테가 내세의 지옥과 연옥을 탐색한 것과 같이, 보들레르는 인간 심중의 지옥으로 사람을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사하기 위하여 인간의 숨겨진 심층과 치부, 사회 질서와 도덕의 터부(taboo)를 파헤쳤습니다. 많은 시인들이 그들의 시상을 자연이나 사랑, 예술의 꽃동산에서 찾을 때 보들레르는 악의 늪에서 아름다움을 얻으려고 했고, 현실이라는 거름통에서 금을 캐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시인의 시도는 당시의 사회와 시단에서는 가히 혁명적이고 충격적이었으며 광기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보들레르는 이 시집에서 타락하고 추잡하며 절망적인 인간 상황만을 담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외롭고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허무로부터 탈출하려는 노력, 동물로 떨어지려는 욕망에 항거하여 이상을 향해 올라가려는 인간의 본질적 갈구가 청순한 샘물과 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보들레르는 오욕에 찬 생활 가운데서도 일생동안 기품(?)을 잃지 않으려고 했고, 영혼의 순결과 고매한 정신적 이상을 끊임없이 추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상, 심정, 종교, 분노를 그는 독특한 감성과 풍부한 상상력, 깊은 영감으로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표묘한 상징과 암시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가히 마술적이라고 할 언어와 음률로 새로운 세계, 신비로운 분위기, 전율적인 감각을 창조함으로써 그는 프랑스 시 역사상 제일 깊고도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습니다. 이 점이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찾고 공감하게 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순수 이데아를 꿈꾼 그의 시는 현대성을 대표하기에 충분합니다.

* 표묘하다 : 끝없이 넓거나 멀어서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렴풋하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ielegy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창조! 긍정적 생성 혹은 반항적 몸짓(시도)의 근저에는 대립의 쌍을 이루는 파괴, 부정(반동), 수용 등이 깔려있습니다. 이것은 자신과 그리고 그것에 맞대어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의 시작이지요.

예술가로서의 삶이 위대하다는 것은 그가 어떤 식으로든 이 비판함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단계 넘어 창조에 대한 실현에 자신의 모든 삶과 정열을 매진했기에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예술가라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러한 정신을 가진 이는 매우 드물지요. 그래서 저는 이 예외적인 이들을 예술가라기보다 '창조자'라 부르고 싶습니다.

주의할 것은 창조자를 니체가 말한 ‘초인’과 동일시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체의 초인은 우리에게 비판의 시도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정작 문제가 되는 창조는 각자의 몫으로 돌려버립니다. 책임의 전가. 그는 인도자였습니다. 창조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이미 출발 전부터 알고 있었던 셈이지요.

젊은 날의 니체의 장황함과 격정이 담긴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은 그가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언급했듯이 분석적이고 회고적인 능력을 갖춘 예술가, 즉 사람들이 찾아다녀야 하지만 전혀 찾으려하지 않는 예외적인 종류의 예술가에 관해 다룹니다.

이 예외적인 예술가란 ‘긍정의 창조자’입니다. 그는 어찌됐건 최후에 긍정할 줄 아는 자입니다. 이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낙관적인 것도 아니요, 긍정의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고, 헛된 희망이라든가 구원과 같은 부정의 세계를 순응하게 하는 어떤 가식적이고 논리적인 범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긍정의 창조자는 자신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이를 통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을 기만하는 어떤 것에도 긍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끌고 내려갑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떨어질 곳조차 없는 그 나락의 끝에서 그는 드디어 박차고 올라섭니다.

긍정, 창조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 비롯됩니다. 그가 결코 절망치 않는 것은 최후를 긍정하고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승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반항자의 최후의 긍정이요, 긍정의 창조인 것입니다. 

우리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통해 긍정의 창조자가 어떻게 잉태되는가를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디오니소스적 기반 위에 아폴로라는 이름으로의 포괄! 이 두 예술 충동의 영원한 형평 원칙에 의거한 상호 조화 속에서 하나의 고귀하고 거대한 힘이 싹트게 됩니다.

삶의 일상적 구속과 한계를 파괴시켜 버리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사물의 본질을 올바로 들여다보고 인식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행동하는 것은 구역질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의 행동은 사물의 영원한 본질을 조금도 바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스꽝스럽고 불명예스러운 것입니다. 그는 결국 죽음을 향해 치달립니다.

이러한 최악의 상태에서 그에게 한 사람이 다가옵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의 아폴로적 인간! 그녀는 구원과 치료의 마술사로 접근해 옵니다. 아폴로적 인간은 우리에게 삶이라는 것을 매순간 살아 볼 가치가 있게 만들고, 그 다음 순간을 체험해 보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순간들의 수많은 환영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세계의 가장 위대한 사건! '긍정의 창조자'의 탄생을 위한 결혼, 축혼이 이루어집니다. 인류 최대의 고요하지만 거대한 축제, 어긋났던 대지와 인간과의 만남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ielegy

사용자 삽입 이미지
99년 말 이후 지금까지 줄곧 IT 분야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겪어온 IT 기술의 변화는 현기증이 날 정도입니다. 마치 빌 게이츠가 언급한 ‘생각의 속도’로 변한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해야 할까요. IT 종사자라면 누구나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대처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한번쯤은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간혹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회의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변화에 속도에 맞춰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다가도 문득 제 자신과 제가 속한 세계에 대한 의미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지요.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생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사회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 문명이란 것에 이제는 스스로 발목 잡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빠르게. 좀 더 빠르게 살기 위해 오늘도 부단히 노력한다”라고 말합니다.

기술과 문화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새로운 신기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만큼 우리는 날이 갈수록 편리한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그 변화의 속도에 합류해 그 속도에 맞추거나 앞서나가야만 한다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그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이지요. 하지만 그 빠름에 비례해 우리는 많은 것을 잊습니다. 전통적인 것에 대한 소중함이라든가. 인간적인 것들 즉, 삶의 진정한 가치라고 여겼던 소중한 모든 것들에 대해 말이지요. 왜냐하면 빠른 변화의 속도로 인해 우리에게는 반성의 시간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하루를 마감하고 다시 하루를 시작합니다. 따라서 저는 '느림'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되찾아야할 미덕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빠름’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는 ‘느림’은 이제 너무나 힘든 속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합니다.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고즈넉한 풍경 아래에서 천천히 산책하고, 어느 낯선 벤치 위에 앉아 마음에 드는 책의 페이지를 펼쳐본다. 그러면 내가 속한 세계는 얼만 퇴색해 보일까. 아마도 지금까지 내가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것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할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이 게으르게 산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속도입니다. 그것은 물리적 시간의 빠름과 느림이 아닌 주체적인 속도 즉, ‘나의 속도'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만의 삶의 방법과 태도를 찾아나가려고 하는 하나의 시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 마냥 허겁지겁 질주해 오지 않았나요? 어쩌면 우리는 IT 속도에 맞추어 빨리 가려고만 했지 제대로 가려고 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금 늦더라도 제대로 나가려는 사람이 돼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빠르냐 느리냐가 아니라 그것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글은 블로터닷넷(www.bloter.net) 기사로 채택되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ielegy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