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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독립영화상영관의 7월 상영작 중 국내 단편 애니메이션 "아빠가 필요해"가 있더군요. 네이버 메인화면에 등재되어 있기에 알았습니다.
 
원래는 지난 2005년 말에 한국독립영화협회와 민중언론 참세상이 함께하는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의 8번째 작품으로 소개되었던 애니메이션입니다. 일본 신카이 마코토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이후 오랜만에 발견한 훌륭한 단편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했었죠.
 
이 단편은 인간처럼 소설을 쓰는 늑대와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른체 생겨버린 여섯 살 딸, 토끼, 바다거북이 그리고 냉장고 안에 있던 사슴이 함께 만들어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B급 좌파'의 저자 컬럼리스트 김규항은 이 애니메이션을 "하야오 만큼 서정적이지만 골계(comic)에선 한수 위"라고 밝히고 있고, 이 작품을 처음 알게 해 준 지인은 자신의 블로그에 “인생 경험도 짧고 생각도 얕은 나로서는 달콤하고 즐거운 10분간의 미소를 담을 수 있는 영화로 남는다. 당신은 당신을 그토록 원하고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곁에 있었던 적이 있나요? 당신이 꿈꾸던 이상과 당신 옆자리에 누워있는 삶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 작품은 엉뚱한 상상력과 위트가 돋보이고, 그와 동시에 주제를 담아내는 솜씨도 만만치 않습니다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원래 가난한 늑대와 부유한 여자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다는데 만약 그랬다면 조금은 진부해졌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지만 과연 문학이 삶보다 중요할까? 지금까지 인생에서 이토록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 적이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영희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 어쩌면 나는 진짜 영희의 아빠이지 않을까?”
 
어쩌면 누구나 누군가의 아빠일 수도 있고... 그렇게 되고 싶다는, 그리고 그것이 그 어떤 위대한 문학 작품보다 삶을 가장 값지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인생의 큰 변화가 필요한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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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이 아무리 별 볼일 없다고 평가하더라도 혹은 긴 시간 내내 참을 수 없이 지루하더라도, 단 하나의 장면이나 대사 때문에 감동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다른 모든 것은 그 하나를 위한 준비운동이었다고 속삭이듯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시간 마음 어느 한구석에 고이 남겨집니다. 언젠가인지 모를 쓰임새의 순간을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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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자전거를 탔던 신지는 마짱에게 묻습니다.

"우리들, 이제 끝난 걸까?"

마짱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소리내어 웃습니다.

"바보야! 아직 시작도 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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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첨밀밀은 소군과 이요의 10년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등려군이라는 중국의 국민 가수를 좋아하는 이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지 10년 후 그 가수의 죽음을 보도하는 한 가게 앞에서 재회하고, 영화는 그렇게 끝납니다. 10년 전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이 10년 후 다시 우연한 만남으로, 그리고 변함없는 서로의 대한 사랑을 확인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안타까울 정도의 짧은 만남과 그럴 때마다 서로의 다른 처지에서 비롯된 어긋난 감정들의 미묘함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또한 바로 옆에 있음에도 그리고 간절히 원함에도 기약 없이 헤어지기도 합니다.

10년 후,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 온 이 둘이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서로의 사랑에 대한 감정이 변함이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영화 마지막에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던 그 모습은 결코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의 웃음은 아니었습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던 밝은 웃음... 그것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첨밀밀에는 소군과 이요의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주변부에는 소군과 소정, 이요와 표형이라는 또 다른 가슴 아픈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어떤 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사랑이기에 더욱 도드라져 보입니다. 그래서 운명적이고 변함없이 영원한 사랑을 웅변하는 주인공들보다 저는 그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을 수밖에 없고,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 소정과 표형에게 시선이 더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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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런거지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랑만이 세상의 전부인 듯
그 하나에만 집착을 하게 되지만
그 하나에만 나의 모든 것을 기대게 되지만
그 하나만을 바라보며 힘을 얻게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지
- 소군과 소정의 사랑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힘들고 어렵던 시기에 누구하나 나의 옆에는 없다고 느낄 때
나의 곁에서 나를 위해 조그만 신경이라도 써주는 사람
결국에는 그 사람 옆에 머물게 되고...
그 사람을 위하게 되고
그 사람과 함께하게 되는 것
그 사람이 떠났을 때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
- 이요와 표형의 사랑


머리로는 부정하지만,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마음, 사랑은 감출 수 없는 것
시간이 변해도... 상황이 바뀌어도
언제나 변하는 않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서로를 기억해내고
그렇게 운명적인 만남을 이끌어 가는
영원히 그러할, 사랑
- 소군과 이요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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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짧은 간격으로 2번을 보면서 저는 사랑에 있어 ‘기다림의 문제’에 대한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영화 중반부에서 다카시는 주인공 준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덕분에 내가 배웠지
 너무 서로에게 끌리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인연이 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심리학에서 한 사람을 잊는데(설사 그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략 6개월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 기간 동안 그 사람과 만나지도 연락도 되지 않는다면 ‘추억’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는 것이지요(물론 이는 통계적 수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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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랫동안 첫사랑의 쓰디 쓴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를, 절친한 사람의 죽음에 살아남은 것만으로 죄의식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단지 '예외사항'으로 넘길까요? 그러기엔 그들이 지닌 바보스러울 정도의 진지함과 절실함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그들 역시 한때는 몇 년에 걸쳐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되풀이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애써 부정하려고 하면서도 별 수
없이 결국에는 '예!'라고 대답을 합니다. 단지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것. 즉,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 속에 지난 일들을 접었다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잊혀짐'이나 '체념'이 아니라 '담담함'입니다. 그는 옅은 웃음으로(하지만 더 없이 슬퍼 보이는) 모든 것을 생의 일부로 수용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껏 끌고 온 그 모든 과정은 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띄게 됩니다.

같은 종류의 기다림이라도 해도 기약이 있고 없을 때의 느끼는 감정은 극과 극입니다. 기약이 있을 경우에는 '설렘'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고통'이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기약 없는 기다림은 스스로 자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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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기다리게 만드는 자는 어떨까요? 기다리는 사람과 기다리게 만드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불행한 것일까요? 그것을 단정적으로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확하게 이거다!'라고 할 수는 없지만 본질적으로 양쪽 다 불행한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지하철 분실물 센터에 보관되어 있는 물건 마냥 언제 찾아갈지도 찾아간다는 기약도 없이 기다림을 당하는 그(혹은 그녀)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린 조차 모르거나 혹은 알았다고 해도 찾으려 하지 않고 기다리게 하는 그.

전자는 다른 주인을 찾음으로써, 후자는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무언가를 찾음으로써 자유로워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항상 잊어버릴 수 있는, 즉 다시 기다림과 기다리게 만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있어 늘 이와 같이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기다리게 만듭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방적으로 기다리거나 기다리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구를 기다리고 누구를 기다리게 만드는가? 나는 누군가의 잃어버려진 물건인가? 아님 무언가를 잃어버린 그인가? 어느 한 쪽이면서도 양 쪽인,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슴 에이는 여운들이 자리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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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스텔지아'의 주인공인 시인 안드레이는 18세기 러시아 음악가인 소스노프스키의 오페라를 쓰기 위해 이탈리아에 옵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지요. 제목 그대로 노스텔지아인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철학적 구원을 받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어머니의 품. 고향을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따뜻함과 더불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다시는 시간을 거스릴 수 없을 뿐더러, 경험의 때가 묻지 않는 완전히 순수했던 시절을 다시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시인의 (어쩌면 모든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이 놓여있습니다. 찾고 싶지만 찾을 수 없는 것들. 도달해야 하지만 도달하지 못하는 것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추구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 외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는 운명말입니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살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시인은, 아니 현대인들은 길을 잃은 항해자와 같습니다. 자신의 어디서 부터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속에 묻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목숨을 다해 그 길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은 자기자신을 위한 고통스러운 행보였지만 이후에는 詩를 통하여 잠들어 있고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깨워 줍니다.

'노스텔지아!' 정신없이 바쁘게 생활하는 현대생활 속에서 지금껏 잊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자신이 진정 바랬던 소박했던 꿈들은 무엇인가요? 한번쯤은 정말 진지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져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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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아닌가? 자주인가?) 미치도록(그렇다고 미친 적은 없다) 외로울 때가 있다. 생각해 보니 마감을 끝낸 후 일주일 정도의 사이에 그런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아무래도 마감의 긴장이 풀리고, 한 동안 할 일이 없어지면서 상념이 많아지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이럴 때는 그 흔한 약속도 없으며, 한 두명 정도 늦게 퇴근하던 팀원들도 그 날따라 아무도 없다. 간만에 지인들을 보려고 해도 한결같이 바쁘단다(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머피의 법칙이 따로 없다. 하지만 이럴 때 무리하게 약속을 잡으면 더 처참한 기분이 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감정이 들 때면 마치 몸이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는 듯한 느낌이다. 또한 몸을 움직이는 것 조차 싫어져서 집에 들어가는 것도 곤혹스럽다(아~회사와 집은 왜 이렇게 먼거야!).

이런 경우 최선의 방법은 음악을 듣는 것이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CDP의 작동 버튼을 누른다. U2의 'zoo station'이 나온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가 생각난다(이 영화에 삽입된 곡이다). 그 영화를 본 후 '나도 하루를 유닛별로 나눠서 생활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난 상속받을 만한 재산이 없지 않은가(부채 승계가 안될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또 한가지! 영화에서 휴 그랜트가 크리스마스때 그랬던 것처럼 와인 한 병을 마시면서, TV에서 방영되는 재탕 영화를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인간은 섬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 설사 인간이 섬이 아니라고 해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섬은 어떻게 하지?'

U2의 'Achtung Baby'와 Verbe의 'Urban Hymn' 앨범을 다 듣고 나니 집에 도착했다. 집에 일찍 도착하닌깐 어머니께서 의아해 하신다. 생각해 보니 평일날 집에서 저녁을 먹는 경우도 드물었던 것 같다. 모든 어머님이 그러하겠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자식이 일찍 들어오는 것을 좋아한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미치도록 외로운 경우가 가끔 생겨도 괜찮겠구나'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사실 나의 어머님의 최대 소망은 이것과 전 반대 즉, 내가 빨리 결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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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은 후 노트북으로 이전에 받아 두었던 영화 '클래식'을 보았다. 그냥 평범한 토종 멜로 영화다. 나는 멜로 영화를 좋아한다. 비평가들이 극찬하는 고리타분한(나는 함량 미달이라 이해할 수 없는 그네들만의 영화) A급 멜로가 아닌 그냥 별 2-3개 받을 정도의 멜로 영화 말이다.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라는(모든 예술 장르가 마찬가지겠지만) 장르가 재미있는 것이 그 작품성과는 상관없이 보는 사람마다 그리고 보는 상황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진다(너무 당연한 말을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 처럼 말한다). 평상시라면 그냥 그러저럭 재미있고 이쁜 멜로 영화 한편 봤구나 하고 느꼈을 이 영화를 보면서 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방안에 박혀 혼자 봤으니 창피하고 말 것도 없었다.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희미한 달빛이 샘물 위에 떠 있으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직장 생활을 한 후 감수성은 이미 메마를 때로 메말랐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던 것 같아 한편으로 기쁘기도 하다(영화보고 눈물 흘리는 것과 감수성이란 무슨 상관이지?).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리고 눈물을 한바탕 흘린 후 조각난 몸이 제자리를 잡은 것 같아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아! 아무튼 노래방 가서 내 18번인 델리 스파이스의 '고백'을 부르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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